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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목적 - (7) 完

by 구운체리 2022. 7. 27.

12일 오후 8시
이반은 워싱턴 주 한복판의 이름도 생소한 오셀로라는 지역에서 의뢰가 들어와 자동차로 편도 세시간에 가까운 주행을 다녀와야 했다. 고인이 평소 그려오던 풍경에 대해서는 잘 알겠노라마는, 이 먼 곳의 조그만 회사 직원을 그곳까지 불러야만 했는가는 의아했다.
고객은 필요 이상으로 까다롭게 굴었고, 이반은 이제 겨우 일을 시작한 지 2주가 된 말단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반이 보내진 것이지만, 그만큼 아는 것도 책임을 질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선배들은 퇴근시간의 교통체증을 고려하지 않고 두시간이면 가는 거리이니 대충 이야기 나누고 곧장 퇴근하라며 그를 보내놓고는 자기들이 전부 정시에 퇴근해버린 채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이반은 거지같은 회사 여차하면 때려치고 만다는 생각으로 멋대로 응대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고객이 만족하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이었다. 순간에는 잠시 보람찼지만, 일이 풀렸다는 것은 이곳에서 마무리까지 짓고 넘어가야 된다는 뜻이었다. 이 먼 곳에 별 것 아닌 서명 몇 장 받겠다고 내일 다시 올 수는 없으니.
그렇게 이반이 일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니 시간은 자정을 넘겨있었다. 방랑자의 영혼을 가진 이반은 차에서 먹고 자는 일을 예사로 여겼다. 이반의 차에는 하룻밤 정도는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담요와 베개, 세면도구 등을 비롯한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다만 차를 주차해둘 곳이 문제였다. 회사는 건물의 일부만을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었고, 건물 관리인은 밤이 되면 주차장의 차단기를 닫아둔 채 퇴근했다.
이반은 회사 근처를 잠시 돌다 터가 넓은 공원을 발견했다. 중세시대에 지은 것 같은 나무집 몇개를 두툼한 가스관이 뱀처럼 휘감은 듯한 건축물이 띄엄띄엄 놓인 동산같은 곳이었는데, 야간출입금지를 알리는 팻말은 있지만 관리인이 없어 제대로 통제가 되는지는 미지수였다. 어쨌든 밤동안 잠시 길가에 차를 대놓기에는 적합한 듯 보였다.
이반은 깊은 잠에 빠졌다.

11일 오후 10시
깊숙히 뿌리를 내려놓고 머물던 땅을 떠나 부유하는 감각을 우리는 여행이라고 부른다. 여행의 길에서 만나는 것들은 끝에 다다를 즈음이면 우리의 뿌리를 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비바람에 깎여나가는 것들을 모두 털어내고 남는 것들은 진정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고, 그것들에 힘을 집중하는 것은 보다 탄탄하게 삶을 지탱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의 목적이 돌아와 머무르기 위해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이 인간의 삶을 다듬어내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광활한 공간과 시간을 인지시켜주는 것이다. 인간의 생애는 찰나이고 앞뒤로는 영원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삶 전체를 하나의 여행으로 본다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고향을 향한 귀성길을 걷는 지독한 종류의 여행일 것이다. 삶에서의 발버둥이란 필멸에 대한 투쟁이고, 필연에 대한 투정이다.
뿌리내린 땅이 없는 이반에게 특히 삶은 종착지가 죽음으로 정해진 여행이었다. 고향이 그리워지는 순간부터 여행은 동력을 잃기 시작한다. 지금의 여행이 즐길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향수는 멀리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이반은 지루할지언정 평온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모양의 삶을 사는 것을 원했다. 그러려면 잠재적인 위기에 대한 훈련이 되어있어야 했고, 그렇다보니 그의 삶은 발버둥의 연속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삶을 사랑했기 때문에 지루할만큼 죽음에 대해 익숙해지고자 했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이미 죽은 사람들을 대하는 일들을 해왔고, 죽을 수도 있는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죽음의 감각이 어느 날 갑자기 섬짓하게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거나 등 뒤에서 덮쳐오더라도 당황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