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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여행의 목적 (일상, 미스터리)6

여행의 목적 - (6) 13일 오후 4시 평소였다면 서류작업을 대강 마무리하고 퇴근준비를 할 시간이지만, 오늘은 잔업이 있었다. 잔업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는 불과 몇시간 전까지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었던 몸뚱아리를 수습하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시신은 새벽에 공원에서 발견되었고, 이런저런 조사과정을 거쳐 이반이 속한 팀에게 인계되기까지 대략 열시간이 걸렸다. 시신이 잔업이 되기까지 어떤 물리적인 과정과 행정적인 절차를 거쳤는지 이반은 알지 못한다. 다만 전달받은 것들을 지시받은 대로 처리할 뿐이다. 이반은 장례를 돕는 일을 한다. 주로 자연사한 노인들의 정돈된 그것을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예를 갖추어 마무리하는 일을 맡는데, 때론 지역 경찰들로부터 연락이 올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이들의 뒤틀리거나 훼손.. 2022. 7. 24.
여행의 목적 - (5) 13일 오후 8시 뜻밖의 일감 때문에 늦어진 퇴근에 지친 이반은 길거리를 헤매이다 처음보는 중식당에서 딤섬을 주문했다. 외관이 깔끔하고 사람이 비교적 적은데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호객을 했고 이반은 배가 고팠다. 주문한 볶음면 요리와 둥그런 딤섬을 받고보니 만두라는 요리가 사람 머리를 본뜬 제물에서 유래했다는 속설이 생각이 났다. 들어찬 고기는 대뇌의 피질을, 잘 가두어진 육즙은 뇌척수액과 핏물을 연상시켰다. 장수의 상징이라는 기다란 면발마저 묻어나온 빨간 양념 때문인지 풀어헤쳐진 사람의 소화계통 장기를 상상하게끔 만들었다. 따지고보면 돼지의 사체를 주재료삼아 요리한 것이니 아주 거리가 먼 망상은 아니리라.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 허기진 기분에 급하게 음식을 밀어넣었더니 속이 더부룩했다. 정.. 2022. 7. 23.
여행의 목적 - (4) 13일 오후 11시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는가?" 이반의 복장을 생각하면 첫 질문으로 타당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검은색 폰을 움직이려고 했다. 나는 상관은 없지만 흰색 진영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 관례라고 알려주었고, 그는 나에게 선을 양보했다. 나는 무난하게 킹 앞의 폰을 두 칸 전진하는 킹즈 폰 오프닝으로 게임을 시작했고, 그는 맞은 편 폰을 e5의 위치에 옮겨놓는 오픈 게임으로 응수했다. "무언가를 판매하는가?" No. 나는 오른쪽의 나이트를 f3의 위치로 보냈고, 이반은 이번에는 점대칭의 위치에 있는 말을 전진시켰다. 나는 전략 같은 것은 몰랐지만, 상대방을 괴롭힐 수 있는 어떤 상황은 상상할 수 있었다. 내 목표는 나이트를 f7의 위치로 보내 검은 여왕과 루크를 동시에 노리는 것.. 2022. 7. 20.
여행의 목적 - (3) 13일 오후 8시 원래의 계획은 자메이칸 음식점을 들렀다 재즈 바에 가서 오후 8시에 시작하는 라이브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7시 반에 정신이 들었으니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했다. 에서 알 파치노는 이렇게 말했다. '스텝이 꼬이면, 그게 탱고다.' 그래, 일정이 꼬이면 그게 재즈지. 나는 재즈 바를 포기했다. 시애틀은 비교적 안전한 곳이지만, 길거리에 주차하는 것을 꺼릴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노상 갱단이 처벌받지 않고 활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처벌 그게 뭔데 싶은 약에 취한 자들이 불유쾌한 접촉을 감행할 가능성은 어쨌든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함부로 사람을 겨누고 쏘아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총기 소지가 합법인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A사의 지하에 주차를 하고 1마일 정도를 걸어가기로 했다. 겸사겸.. 2022. 7. 17.
여행의 목적 - (2) 13일 오후 1시 점심에는 스노콸미 산을 올랐다. 약 5마일정도 되는,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가벼운 코스였다. 봄이 한참 지났지만 시애틀은 북쪽에 있는 지역이고, 산을 오르며 지면의 복사열과 멀어질수록 기온은 더욱 떨어진다. 중턱 즈음부터는 겨울이었는데, 곳곳에 녹지않은 눈들이 쌓여있었고 저 멀리 높은 곳에는 영영 녹지않는 만년설이 드리웠다. 여름에도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생태학에 문외한인 나에게 스노콸미 산의 색감은 그저 동화같았다. 서서히 녹아내리는 눈 때문에 다습한 환경이 유지가 되어 짙은 녹색의 이끼들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만연했다. 두꺼운 나무들이 군데군데 잘려나간채 쓰러져있었는데 속살이 새빨갰다. 가스관의 선명한 빨강색과는 달리, 생고기의 속살을 찢어 약간의 갈변과정이.. 2022. 7. 16.
여행의 목적 (1) 12일 오후 2시 사람들은 오늘이 흘러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오늘과 같은 내일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입버릇처럼 '이대로 영원히'를 꿈꾸다가도, 정말 지금 이대로만 영원히 같은 날들이 반복만 되는 꿈을 꾼다면 온 힘을 다해 손가락을 까딱여 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홀린 듯이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항공편을 예매했다. 저렴한 가격대 중 가장 빠르게 출발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출국날 공항에서는 경유지에서 꼬리를 자르고 시애틀로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고, 곧장 표를 끊어 행동으로 옮겼다. 로스앤젤레스에는 지난 날 내가 두고 온 것들이 시간의 옷을 두르고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시애.. 2022.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