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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여행의 목적 (일상, 미스터리)

여행의 목적 - (5)

by 구운체리 2022. 7. 23.

13일 오후 8시
뜻밖의 일감 때문에 늦어진 퇴근에 지친 이반은 길거리를 헤매이다 처음보는 중식당에서 딤섬을 주문했다. 외관이 깔끔하고 사람이 비교적 적은데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호객을 했고 이반은 배가 고팠다. 주문한 볶음면 요리와 둥그런 딤섬을 받고보니 만두라는 요리가 사람 머리를 본뜬 제물에서 유래했다는 속설이 생각이 났다. 들어찬 고기는 대뇌의 피질을, 잘 가두어진 육즙은 뇌척수액과 핏물을 연상시켰다. 장수의 상징이라는 기다란 면발마저 묻어나온 빨간 양념 때문인지 풀어헤쳐진 사람의 소화계통 장기를 상상하게끔 만들었다. 따지고보면 돼지의 사체를 주재료삼아 요리한 것이니 아주 거리가 먼 망상은 아니리라.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 허기진 기분에 급하게 음식을 밀어넣었더니 속이 더부룩했다. 정처없이 걸으며 소화를 좀 시켜볼까 싶었고, 요란한 군중 속에 파묻혀 맥주를 몇잔 걸치면 배설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싶을 즈음 시끌벅적한 펍이 하나 보였다. 한편에는 핀볼 게임기가 발광을 하며 전자음을 내고 있고, 사람들은 빙고 게임이라도 하는 듯 테이블마다 종이를 펼쳐놓고 들여다보며 삼삼오오 끙끙대고 있었다. 자세히보니 체스판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반은 맥주를 한잔 주문했다.
보아하니 고정회원이 거의 없는 비인기 동호회인 것 같았다. 체스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잠깐 훑어보면 누가 고수이고 하수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눈빛에서부터 남다른 승부욕이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이반은 맥주도 없이 홀로 앉아 상대를 기다리는 히스패닉계 젊은이의 맞은 편에 앉아 대결을 신청했다. 게임에 앞서 이름을 소개하며 손을 내밀자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을 밝힌 이 친구는 타이머로 향하던 손을 급하게 틀어 이반의 손을 맞잡았다.
에스테반은 성질이 급했고 허둥대는 동작이 많았다. 그런 것 치고 체스 게임에 익숙하지는 않은 듯 보였다. 이반이 차례를 마치고 무슨 말을 꺼낼라치면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타이머를 내리찍듯 누르며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주어진 경우의 수를 고민하는 듯 여러 말들을 만지작 거렸는데, 그러다보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한번에 두개의 말을 움직일 수 없다는 규칙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반은 약간의 짜증이 일었고, 왜 이 친구가 홀로 멀뚱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대화의 상대로도, 게임의 상대로도 적합하지 않은데다 술도 마시지 않으니 좋은 친구가 되기는 글렀다.
두번째 상대는 작은 키에 배가 볼록하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로이라는 이름의 노인이었다. 그는 이미 꽤 많은 술을 마신 듯 보였고, 이토록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 어울릴 수 있음에 대해 감사해하는 인상을 풍겼다. 그는 이반이 말을 걸자 기쁘게 대화상대가 되어주었는데, 문제는 그가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데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체스는 뒷전이고 이반이 한마디 말을 하면 열마디가 넘는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그러다 열시가 되자 시간이 늦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가 득점한 기물의 상황은 비슷했지만, 노인은 예우의 차원에서 자신의 킹을 쓰러트리며 기권패를 선언하고 자리를 떴다. 이반은 김이 샜다.
세번째 상대는 과묵한 인도계 미국인이었다. 조용히 노인이 떠난 자리에 앉더니 말들을 정리하고 타이머를 초기화하더니 루크 앞의 폰을 전진시키는 오프닝을 했다. 이반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킹 앞의 폰을 전진시키는 것으로 응수했다. 노인의 수다에 지쳐있던지라 이반도 잠시간 말을 하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고요함은 이반이 캐슬링을 시전할 때 처음 깨졌다.
당최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 상대에게 캐슬링이라는 규칙을 구글로 검색하여 알려준 뒤에야 다음 수를 둘 수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것인지 자신의 킹을 사지로 몰아넣는 수를 자꾸만 두기에 그것은 규칙에 어긋난다고 몇차례 지적하자 패자를 비웃지 말라며 기분이 상했다는 표정을 짓고는 술집을 떠나버렸다. 이반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실망할 가치조차 없는 상대였다. 대체 여기는 누구를 위한 곳인가.
그렇게 배회하던 이반의 시야에 젊은 동양인 남녀가 보였다.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의 규칙을 알고, 대화를 할 줄도 알았다.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일수도 있겠으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태가 났으니, 마지막으로 대화를 시도해 볼 상대로 적당한 듯 싶었다. 이제 밤도 늦었으니 아니라면 어쩔 수 없고. 이반은 그들의 옆자리가 비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냉큼 앉았다. 저녁으로 먹은 뜻밖의 중국 음식이 나를 이들에게 인도하기 위함이었던가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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