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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여행의 목적 (일상, 미스터리)

여행의 목적 (1)

by 구운체리 2022. 7. 13.

12일 오후 2시
사람들은 오늘이 흘러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오늘과 같은 내일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입버릇처럼 '이대로 영원히'를 꿈꾸다가도, 정말 지금 이대로만 영원히 같은 날들이 반복만 되는 꿈을 꾼다면 온 힘을 다해 손가락을 까딱여 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홀린 듯이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로스앤젤레스로 향하는 항공편을 예매했다. 저렴한 가격대 중 가장 빠르게 출발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출국날 공항에서는 경유지에서 꼬리를 자르고 시애틀로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고, 곧장 표를 끊어 행동으로 옮겼다.
로스앤젤레스에는 지난 날 내가 두고 온 것들이 시간의 옷을 두르고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시애틀에는 내일을 사는 친구가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두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기억을 붙들고 되새김질하며 오늘을 살아내는 나에게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친구이니, 우선순위를 높게 두는 것이 맞았다. 친구가 두고 온, 때론 잊고 살며 그리워하는 지난 날의 것들을 내가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균형을 맞춘 채 각자의 방향으로 지속가능하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믿고있다.

12일 오후 8시
하늘은 짙은 파란색, 풀밭은 텔레토비 동산같은 연두색, 가스관은 빨간색이었다. 동산 너머에는 강과 강을 잇는 사이지역의 거대한 호수가 바다처럼 잔잔하게 흐르고있고, 그 뒤로 갓 도시로 자라나고 있는 마을이 있다. 왼편으로는 언덕을 따라 촘촘하게 심어진 낮은 집들이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뾰족하게 우뚝 솟은 스페이스 니들이 경계선을 그어두고, 그 사이로 남들보다 키가 조금 큰 대기업의 본사 건물들이 슬그머니 자라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여기에 있다.
그런가하면 뒷편에서는 아까부터 관악기 소리가 흥겹다. 열댓명 되는 단원들이 각자 좋아하는 코스츔을 입고왔다. 피카츄, 잭 스패로우, 루이 14세, 어라 뚜비? 텔레토비가 우리나라 컨텐츠가 아니었지 참. 제법 구색을 갖추어 화음을 쌓는데 조화에 구멍을 내는 파이프가 둘 정도 있는 것이 신경을 간질였다. 여섯 명 정도 관객이 있었다. 그들은 이따금씩 환호성으로 소리의 공백을 채워주었다. 이제는 단원들 중 두 명이 앞으로 나와 번갈아 독무대를 가지며 음악으로 겨루는 스토리텔링을 컨셉으로 잡고 공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스웍스 공원은 20세기 중반 지역에 가스 기반의 에너지를 공급하던 시설이 버려진 것을 시에서 매입하여 테마파크처럼 꾸며 공공에 개방해둔 공간이다. 꾸며두었다는 표현은 거창하다. 실상 낙후된 파이프들을 새빨갛게 새로 칠하고, 위험한 곳에 펜스를 두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상주하는 공공관리인이 없으니, 밤이 두렵지 않은 모험가들은 아지트로 삼으라고 꿀을 발라둔 것에 가까웠다. 실제로 어느 담벼락에는 거친 솜씨로 그린 화려한 그래피티 아트가 전시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조그맣게 낙서금지 팻말이 붙어있었다.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의 완성도에 관계없이 마냥 즐겁게 어울려노는 그곳을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빠져나오기로 했다. 가만 듣다보니 관악 십오중주의 매력에 혼을 빼앗겼지만, 아직 총이 무서운 우리는 그곳에서 이방인이었고 해가 지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13일 오전 10시
에어팟은 그 안에 내장된 기술력만큼이나 유려하고 부드러운 색감과 질감 그리고 굴곡을 가지고 있다. 미끄럽다는 뜻이다. 헐렁한 주머니에 넣고 몸을 한껏 뒤로 기대면 스르륵 빠져나갈 위험이 높다. 나도 알고싶지 않았다. 제발 차에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역시 어제 그곳이었다. 멀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우리는 날이 밝고 되도록 빠르게 가스웍스 공원을 다시 찾았다. 음악에 취해있는 사이 깊게 기대어 누웠던 캠핑의자 발치에서 다행히 찾을 수 있었다. 인적이 드문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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