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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여행의 목적 (일상, 미스터리)

여행의 목적 - (4)

by 구운체리 2022. 7. 20.

13일 오후 11시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는가?"
이반의 복장을 생각하면 첫 질문으로 타당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하며 자신의 검은색 폰을 움직이려고 했다. 나는 상관은 없지만 흰색 진영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 관례라고 알려주었고, 그는 나에게 선을 양보했다. 나는 무난하게 킹 앞의 폰을 두 칸 전진하는 킹즈 폰 오프닝으로 게임을 시작했고, 그는 맞은 편 폰을 e5의 위치에 옮겨놓는 오픈 게임으로 응수했다.
"무언가를 판매하는가?"
No. 나는 오른쪽의 나이트를 f3의 위치로 보냈고, 이반은 이번에는 점대칭의 위치에 있는 말을 전진시켰다. 나는 전략 같은 것은 몰랐지만, 상대방을 괴롭힐 수 있는 어떤 상황은 상상할 수 있었다. 내 목표는 나이트를 f7의 위치로 보내 검은 여왕과 루크를 동시에 노리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풀린다면 나는 상대의 한 턴을 낭비시키며 루크를 따낼 수 있을 것이다.
"일적으로 말을 많이 해야하는가?"
No. 이번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이반은 제법 말주변이 좋은 친구였으니까. 하지만 덧붙이기로, 말을 많이 하지만 일에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고객과 대화를 해야하는 서비스 업종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반은 퀸 앞의 폰을 전진시켜 내 오프닝 폰과 c4 위치의 비숍을 동시에 노렸다. f7에 놓인 말은 상대의 왕에게 잡힐 수 있기 때문에 비숍의 비호를 필요로 했다. 나이트는 두번의 이동으로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비숍을 b3로 후진시키며 그가 내 오프닝 폰에 정신이 팔려있기를 바랬다.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가?"
No... well it depends. 이반은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운전을 하는 것이 주요 업무는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 장거리 운전을 할때도 있다고. 이반은 고민도 없이 내 폰을 잡고 나의 나이트를 위협했으며, 나는 고민도 없이 그 나이트를 g5로 보냈다. 곧장 아주 형편없는 실수임을 알았는데, 그곳은 진로가 열린 검은 여왕이 아무런 손해없이 다녀갈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달리 어떻게 대비할 수 있었나 복기해보니, 비숍을 뒤로 물리며 손해를 본 순간부터 글러먹은 게임이었다. 낭패스러운 표정을 들키지 않도록 관리했다. 끝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봐야지.
"너무 막연한데, 힌트 좀 주지? 너가 대신 질문해볼래?"
나는 글러먹은 체스판 대신 친구의 스무고개로 관심을 돌렸다. 이반은 체스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얼 기다리는가, 여왕을 움직이지 않고. 내가 이 지역의 고용주라면 이 친구에게 어떤 일을 맡기고 싶을까. 전혀 모르겠다. 나는 고용주의 삶도, 이 지역의 삶도, 이 친구의 삶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아는 것을 물어보자.
"IT기기와 친숙한 작업을 하는 일인가?"
No? 젠장, 일을 하기는 하는거야? 나는 그의 직업을 단어로 적어두고 사전 순서대로 업다운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정답을 맞추는 것보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의 재미가 중요했고, 그가 폰을 f6으로 전진시켜 자기 여왕의 길을 가로막으며 나의 나이트에게 덤볐기 때문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나는 경박하게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태연한 움직임으로 나의 말을 계획했던 칸에 옮겨두었다.

13일 자정
이반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들은 잠시 말없이 맥주를 홀짝였다.
게르만족의 인상을 풍기는 아저씨가 공격적으로 다가와 너희 셋과 동시에 1:1로 게임을 두고 싶다며 야단을 떨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고 그곳을 빠져나오기로 했다. 이반이 새로운 경기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계산을 마치고 술집을 빠져나오는 길에 이반은 게르만 남자의 게임을 거절했고, 몇발자국 걸어나왔을 즈음에는 잰걸음으로 달려나와 일행을 멈춰세웠다. 이반은 남자에게 연락처를 물었고, 그들은 서로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찾아 팔로우했다. 서로 종종 안부를 묻기로 하며.
이반은 곧장 반대 방향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그들의 여행이 다시 만나게 될 일이 있을까.

13일 오후 11시
"그 일은 어떻게 소개받게 된거야?"
이반은 끙 소리를 냈는데, 체스 게임이 꼬였기 때문인지 친구가 룰을 어기고 주관식의 질문을 던졌기 때문인지는 몰랐다. 이반은 여자에게 스무고개 게임의 룰을 다시 설명해주는 동시에, 체스게임의 규칙에 대한 설명도 이어갔다. 킹을 움직여서 나이트를 잡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체스는 각 기물의 가치가 평등하지 않은 게임이다. 흰색 나이트는 비숍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킹이 다음 턴에 죽게되는 이동은 패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규칙으로부터 금지되어 있다. 검은색 여왕이 몸을 피했고 흰색 나이트는 검은색 루크를 쓰러트렸다.
"종교적인 것과 관련이 있나?"
둘 중에 고르라면 Yes겠지만 질문이 너무 모호하잖아. 특정 종교도 아니고 말이야. 여자는 스무고개를, 이반은 체스를 반쯤 포기한 듯 보였고 신난 것은 남자 혼자였다. 이반이 루크 하나를 손해본 뒤로 둘은 공평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폰에는 폰으로, 기물에는 기물로 서로의 것을 따내며 엔드게임을 향해 나아갔다. 스무고개에는 진전이 없었고, 이반은 체스 말들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며 대화의 공백을 채웠다.
세상 어느 왕이 자기 대신 죽으라며 부인을 전투에 내보내겠느냐. 성직자의 화려한 기동력은 또 어떻게 설명할건데. 실제 전투를 생각했을때 각각의 기물들이 상징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기타 등등.
"힌트를 더 안 주면 난 포기할래. 내가 졌어."
검은색 여왕이 흰색 왕을 위협했고, 흰색 왕은 두칸 왼쪽으로 움직이면서 루크를 오른편에 불러들이는 캐슬링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반이 열심히 각 기물의 역사적 유래를 설명하는 사이 남자는 두 번 정도 '나 캐슬링 했다'고 언급했다. 이반은 세번째 '캐슬링'을 듣고서야 다음 수를 두었다.
"힌트를 하나 주자면, 사람들은 내 직업을 무서운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 하지만 이건 합법적이고, 무서운 일이 아니야."
남자는 두 개의 기물을 제물로 바치고 검은색 여왕을 잡아내며 승기를 굳혔다. 남자에게는 루크와 여왕 그리고 두개의 폰이, 이반에게는 비숍과 세개의 폰이 남아있었다. 체스판의 칸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번갈아가며 칠해져있는데, 모든 비숍은 자신이 태어난 칸의 색깔을 벗어날 수 없다. 도달할 수 있는 칸에 한계가 있는 기물은 비숍이 유일하다. 이반은 이제 자신이 노릴 수 있는 최선의 결과가 'draw'이며 어떤 조건 하에 그것이 가능한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죽음과 관련된 일을 하는구나?"
Yes. 남자는 이반의 왕을 제외한 모든 검은색 말들을 잡아내는 대신 여왕과 하나의 폰을 잃었다. 홀로 남은 흰색 폰이 여왕으로 승격하자 이반은 항복을 선언했다. 스무고개는 정확한 직업의 이름을 맞추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역시 그 즈음에서 끝이 났다고 보아도 됐지만, 남자는 한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혹시 오늘 일터에서 무서운 감정을 느꼈니?"
Yes. 이반의 호흡이 순간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남자와 여자는 이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세번째 맥주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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