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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이웃3

당신의 이웃 vol.2 - (3) 3. 중학교 3년은 교내 도서관에서 살았다. 당시 교장은 국공립 학교 중 최고의 장서수준을 갖추기 위해 꽤나 많은 공간을 할애했고, 도서구매신청을 하면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전부 사들였다. 제목이 그럴싸하면 만화책이나 성인용 도서도 가리지 않았는데, 근로장학생과 사서 그리고 교무처의 담당 선생이 서로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신뢰의 사슬구조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런 책들이 일단 들어오고나면 장학사나 교장선생님 등에게 발각되어 임의처분되지 않도록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구간에 재배치하는 것이 나를 비롯한 상주학생들의 비공식 업무였다. 내가 근현대 철학 부문 서가에 하루종일 쳐박혀서 책장을 헤집어놓아도 그 누구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실제로 그 책들을 읽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책 속의 인물들은.. 2022. 1. 18.
당신의 이웃 vol.2 - (2) 2. 어릴 적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할 일이 많았던 것이 나에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혹은 인도함이었는지 모르겠다. 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박 여사는 죽고 싶다, 죽이고 싶다, 가까운 누군가 죽는 꼴을 보고싶다 등등 죽음에 대한 언급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자체가 나에게 죽음에 대한 인상을 준 것은 아니다. 입버릇에 불과했을 뿐, 그녀는 누구보다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철천지 원수라도 물에 빠졌다면 구하고봤을 성정이었다. 하지만 그 영향으로 또래보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조금 친숙하고 무해하게 느낀 것 또한 사실이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인가, 전교생을 대상으로 자살 예방 표어 및 포스터 대회가 열렸었다. 나는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도통 가늠할 수 없었.. 2022. 1. 13.
당신의 이웃 vol.2 - (1) 1. “도와달라고는 안 해. 방해는 하지 마.“ 예슬이는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나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나는 도와줄 생각도, 방해할 생각도 없다. 그저 그녀가 빨리 내 앞에서 사라져주었으면 하는 생각 밖에는 없다. 어둠과 짙은 화장 뒤어 숨어있어도 영락없는 고등학생이다. 명찰 달린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도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삶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수 없으므로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영역이 아직 남아있는 미성년자다. “알겠어요. 제가 좋은 곳도 많이 알고 좋은 방법도 많이 알아요. 그러니까 우리 우선 장소를 옮기면 안 될까요?” 나는 티를 안 내고 싶었지만 세상 그 어느 때보다 당황해있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예슬에게도 들리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는 오로지 나를 방해하려.. 2022.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