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 연재/당신의 이웃 vol 2. 변명 (범죄)

당신의 이웃 vol.2 - (3)

by 구운체리 2022. 1. 18.

3.
중학교 3년은 교내 도서관에서 살았다. 당시 교장은 국공립 학교 중 최고의 장서수준을 갖추기 위해 꽤나 많은 공간을 할애했고, 도서구매신청을 하면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전부 사들였다. 제목이 그럴싸하면 만화책이나 성인용 도서도 가리지 않았는데, 근로장학생과 사서 그리고 교무처의 담당 선생이 서로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신뢰의 사슬구조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런 책들이 일단 들어오고나면 장학사나 교장선생님 등에게 발각되어 임의처분되지 않도록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구간에 재배치하는 것이 나를 비롯한 상주학생들의 비공식 업무였다. 내가 근현대 철학 부문 서가에 하루종일 쳐박혀서 책장을 헤집어놓아도 그 누구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실제로 그 책들을 읽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책 속의 인물들은 나와 비슷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내 질문에 흐릿하게나마 대답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의 질문을 비웃거나 질책하는 일이 없었다. 존중받는 대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도서관에 모여 각자의 질문을 던졌고, 응답보다 질문 자체에 뜻을 두는 이들이 가장 깊숙한 곳에 누구보다 오래 머무르곤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책 속에 빠져 지내는 사이 내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갔지만, 딱 둘 만이 기억에 남는다. 한 명은 나와 같은 질문을 찾으러, 다른 한 명은 그냥 나를 찾으러 왔다. 전자는 한 살 많은 주하 선배였고, 후자는 같은 반의 친구 창균이였다.
주하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나와 비슷한 책을 뒤적이는 그녀를 보며 학교괴담 속의 귀신이 성불할 방법을 찾아 온 서가를 뒤지는 것이 아닌가 상상하곤 했다. 눈이 스무번 정도 마주칠때까지 서로 말을 걸지도 아는 체도 않았으니 아마 그녀도 비슷한 생각이었던걸까.
창균이가 어느 날 서로 가까이 쭈그리고 책을 읽는 우리 둘을 보더니 저 음침한 여자는 누구냐고 묻기 전까지 우리 사이는 그랬다. 명찰의 색이 달라 선배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지만, 창균은 일단 떠오른 질문을 뱉고나서 생각하는 부류였다. 사실 그때까지 난 창균에게도 관심이 없어서 같은 반 친구인 것도 몰랐었다. 선배의 이름이 주하라는 것도 그때야 알았다.
주하는 창균을 말없이 째려보며 사라졌다. 
‘음침?’
나는 그날로 두 명과 각각 친구가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창균이 나를 제법 좋아했다. 남는 시간에는 창균의 친구들 몇 명과 무리지어 다니게 되었고, 선배와는 종종 짧은 대화들을 나누었다. 주로 서로를 자료검색용 도슨트로 여기는 질답으로 구성된 대화였지만, 그 속에 서로가 어떤 주제를 좋아하고 어떤 방향으로 식견을 확장하고 있는지 담겨있으니 제법 알찬 대화였다.
그런가하면 창균의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는 가볍고 실없었다. 비속어가 절반이었고 성적인 농담들로 가득했다. 대화의 내용 자체보다 그런 식의 대화를 서로 허락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관계 속에서 나름의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던 것 같다. 어쨌든 편안하고 즐거웠다.
여러모로 잘못된 성 지식을 갖고 있던 순규를 데리고 반강제로 함께 포르노 감상회를 연 후 그 놈이 제 부모님께 고자질을 해 박 여사의 귀에 소식이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나이를 열여섯이나 먹고도 아기가 여자 배꼽에서 나온다고 믿는 것은, 남에게 관심없는 당시의 나조차도 참을 수가 없었다.

주하는 볼 때마다 야위어갔는데, 그녀가 찾는 책은 존 롤스에서 존 스튜어트 밀로, 마키아벨리를 거쳐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점점 더 먼 과거를 여행하기 위해 생명력을 대가로 바쳤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퀭해졌고, 그만큼 질문들은 깊어졌다.
“죽음을 극복해 영원을 살기 위한 답이 여기에 있어. 봐, 이렇게 대충 뱉은 말들이 몇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우리한테 와 있잖아. 자, 플라톤은 살아있다.”
“무슨 개소리세요 누나. 애초에 죽음을 왜 극복하는데요.”
“우린 다 죽어. 하지만 그걸 이겨내려는 욕망이 곧 삶인거야. 물에 빠졌는데 발버둥을 멈춘 인간이 있다? 그건 지금 잠깐 숨은 쉬고 있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거거든.”
“플라톤은 죽었어요. 사람이 잠깐 숨 쉬는 동안을 우리는 살아있다고 불러요. 가만히 떠있으나 발버둥치면서 버티나 살아있는 기간은 크게 차이 안 날 걸요?”
“발버둥치면서 만든 물보라는 건너편 대륙에 쓰나미를 일으킨다고.”
“그거 발버둥 아니고 나비 날갯짓… 됐다, 누나 문과로 가죠? 그 어쨌든 그렇다고 쓰나미에 나비 이름을 붙이지는 않잖아요.”
“야. 너 내 이름 기억해둬. 나중에 뭐 책 같은거 쓰면 꼭 등장시켜. 그게 내 발버둥이 될 거야.”
“그냥 지 할말만 하는구만. 이젠 더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을텐데, 어떻게 창세기라도 구해다 드릴까요?”
“아냐, 멍청하긴 해도 어쨌든 지금 세상을 바꾸는 건 살아있는 정치인들이잖아. 대통령 후보 자서전 위주로 찾아볼거야.”
“그 책들은 새로 신청하셔야 될 거에요. 그리고 여기 말고 입구 가까이에 비치될거고요.”
“김한. 네 이름 기억해두겠어. 나중에 나를 한 번 찾아줘.”
그리고 나는 한동안 선배를 만나지 못했다. 이상하게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이 대화가 머릿속에
오래 맴돌며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중이 언제를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내가 졸업할 즈음에 그녀의 소식을 찾아보았을 때 소문 속의 그녀는 성전환을 하기 위해 머리를 밀고 동남아 어딘가로 사라져있었다. 달리 더 찾아볼 방법도 없었고 ‘주하’라는 이름은 성 중립적이지만 애를 써서 바꾼 성별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싶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불가능한 영원을 꿈꾸는 것이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가장 충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아감과 동시에, 옛날 사람들도 지금의 사람들만큼이나 멍청했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저 그 사소한 멍청함들이 시간에 빛바래 좋은 모습들만 살아남아 그럴듯하게 보일 뿐.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을 거의 다 섭렵할 무렵 졸업이 다가왔다. 아는게 많아 중상위권의 성적은 유지했지만 그 이상을 하기 위해서는 개중 일부를 잊는 법도 배워야했다.
이를테면 내가 본 어떤 책에서는 0을 자연수로 간주한다고 했고, 김 모 시인은 후에 비공식적으로 예찬의 시구 속에 숨겨둔 회한을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교과과정 외의 지식이므로 정답으로 인정될 수 없었다. 적어도 나 하나를 위해 앞날 창창한 전교권의 모범생들이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되었다.
진리는 그저 사치일 뿐이었다.

'단편 연재 > 당신의 이웃 vol 2. 변명 (범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의 이웃 vol.2 - (6)  (0) 2022.01.27
당신의 이웃 vol.2 - (5)  (0) 2022.01.25
당신의 이웃 vol.2 - (4)  (0) 2022.01.20
당신의 이웃 vol.2 - (2)  (0) 2022.01.13
당신의 이웃 vol.2 - (1)  (0) 202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