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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당신의 이웃 vol 2. 변명 (범죄)

당신의 이웃 vol.2 - (4)

by 구운체리 2022. 1. 20.

4.
길어야 몇개월일 줄 알았던 김 부장님의 지방파견은 정권교체에 따른 개발계획 확장으로 최소 5년이 연장되었다. 바뀐 정권이 다음 대선도 승리하며 균형발전의 기조를 유지한다면 10년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김 부장님은 견디다 못해 조그만 원룸을 따로 얻기로 했다. 그만큼 집안 사정은 어려워졌고, 박 여사는 늘어가는 지병만큼 날이 바짝 섰다.
고등학교 생활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집단 환각에라도 빠진 것처럼 선생들의 주도 하에 모든 하루의 대화가 대학으로 시작해 대학으로 끝이 났다. 학생들은 그 혼돈의 충실한 일부가 되거나 아주 벗어나거나 하나를 확실하게 선택해야했다. 애매하게 걸쳐있는 학생들을 밀어내든지 당기든지 하기 위해 온 세상이 지랄을 떨었다. 자신의 세계를 명확히 정한 이들은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는 상호작용을 하려들지 않았고, 같은 세계의 사람들끼리는 날을 세워가며 다투었다.
나는 혼돈을 택했다. 박 여사의 등쌀과 내 중학교 성적의 상승곡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담임, 그리고 어차피 몸 쓰는 일에는 소질이 없는 내 적성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래봐야 얻게 될 점수와 가게 될 대학, 그리고 살게 될 인생이 고만고만해 보이는 인간들끼리 특히 치열하게 서로를 물어뜯는 모습이 우습게 보였지만, 어느 날 내 몸에 난 상처를 보여주자 나를 내버려두어 생활 자체는 불편하지 않았다. 박 여사가 아랫집의 정신나간 여자와 몸싸움을 벌이다 칼부림까지 날 뻔한 것을 막다가 생긴 상처였지만, 아이들은 내가 학업 스트레스에 못 이겨 자살시도를 했다고 믿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진실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기에 멋대로 생각하게 두었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였고 구급차가 올 때쯤 기절했지만, 박 여사는 내가 눈을 뜨자마자 퇴원시켜 온갖 보양식을 먹이고는 바로 다음날 등교를 시켰다. 일을 키우지 않는 대가로 꽤 후한 보상을 받았다. 그렇게 칭칭 동여맨 붕대가 눈에 띄었고, 팔목 깊게 난 칼자국은 아주 성공적으로 실패한 자살 시도처럼 보였을 것이다. 내가 지나가면 아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고등학교 도서관의 장서 수준은 형편없었고 창균은 다른 학교였으며 순규가 같은 학교에 있었지만, 예의 포르노 사건 이후로 우리는 의절한 상태였기에 난 친구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적당한 수능 점수를 들고 서울의 대충 이름난 대학교의 철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철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대단한 기대를 품고 간 것은 아니다. 애초에 대학에 뜻이 없었지만 환경의 광기에 휩쓸려 지원했기에 그나마 친숙한 주제를 택했을 뿐이었다. 취업률이 낮고 인기도 없는 학과라 성적에 비해 학교 이름을 높일 수도 있어서 선생들이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그 집단 내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분위기가 한 사람 속에서도 공존했다. 이 학교 씩이나 온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는 자부심과, 겨우 이 학교에나 온 스스로와 제 주변을 하찮게 여기는 패배의식의 양가감정이 빚는 충돌이 여기저기 혼돈을 빚어놓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니 내 대학 생활은 혼돈의 연속이었다. 우선 나는 점점 미쳐가는 박 여사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취를 택했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던 아버지가 내 편을 들어주었고, 나를 떨쳐내면 박 여사도 보다 서울다운 서울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박 여사를 설득하기 위해 나는 부대비용 일절을 내가 스스로 벌어 부담하기로 약속했다.
학업은 진부했고 생활은 역설적이었다. 그 누구도 진심으로 학과를 사랑하지 않는데 웬놈의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학과 행사는 주에 두세번꼴로 잡혀있었다. 그걸 다 참석하면 나는 참가비 낼 돈을 벌 시간은 커녕 맨 정신으로 수업에 들어갈 건강조차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동기들은 매주 금요일마다 뜨겁게 불타올랐다가 곧바로 차게 식었는데 그 혼랭왕복의 혼돈이 가져다주는 환락의 멀미에 취한 채, 위장을 뒤집어 온몸의 수분을 게워내는 것을 성인이 되기 위한 의례로 삼은 것 같았다. 나는 과대표에게 내 통장잔고와 빈약한 가정관계를 탈탈 털어 인증한 후에야 한 달에 한 번 있는 최소한의 행사에만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받았다.
그렇게 나는 3월 말 월례회의 뒷풀이 행사에 반강제로 참석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으로 한 장소에 모인다는 것부터가 충격이었고 부담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집에 가고 싶었는데 이미 친해진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떼를 지어 놀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귀가 먹을 것 같아 차라리 빨리 취해서 잠들었다 깨자는 생각으로 혼자 연거푸 술잔을 비우는데 부담스러울만큼 두꺼운 화장을 한 여자가 내 앞에 앉았다.
“재미없니, 여기?”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내 손목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붙들었다.
“너, 1학년이구나? 난 3학년이야, 자.”
“예... 예?”
의례적인 자기소개인 줄 알았던 나는 그녀의 손목에 그어진 세 줄의 칼자국을 보고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일부러 그것을 드러내려고 클렌징 티슈를 꺼내 팔목을 벅벅 닦아댔으니까. 이건 해명이 좀 필요하지 않나 싶었는데 그녀가 내 손을 붙잡고 일으켜세웠다.
“나가서 얘기하자.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아.”
그렇게 나가는 우리를 누구도 붙잡지 않았다. 3월에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외투를 입은 그녀와 신입생답지 않게 어두침침하고 숫기없는 나는 그곳에 환영받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참가비를 냈으면 쓰임이 다한 것이다.
“난 미경이야. 스물일곱. 승무원 준비해.”
나는 일단 시끄럽고 기 빨리는 혼돈 속에서 구출된 것이 기뻤지만, 조용한 술집으로 옮겨가서도 내 이야기를 할 기회는 없었다. 미경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20대 전부를 헤맨 사람처럼 스스로의 사연에 도취되어 멈출 줄을 몰랐다. 내가 그은 게 아니고 사고로 생긴 상처라고 어디 적어서라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상처 얘기가 나올 즈음에는 만취한 채 내 품에 파고들어 통곡을 하기 시작했으므로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내 상의에 눈물, 콧물, 침 그리고 번진 화장을 온통 비벼대더니 정신이 들었는지 미안하다며 물티슈로 벅벅 닦으려고 했고, 닦일리가 있냐 미친 여자야. 그렇게 내 젖꼭지 근처를 문질대던 손짓이 점점 느려지다 애무의 형태로 변하더니 본인 숨소리가 거칠어지기에 가까운 모텔에 데려다놓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스무 살의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그녀의 생김새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온통 두꺼웠던 기억들만은 또렷하다. 그녀의 외투도, 화장도, 입술도, 싸구려 모텔에서 사용했던 콘돔도. 술인지 감정인지 뭔지에 취한 그녀는 내 위에서 혼자 마구 달려대다 지쳐 잠들었고 나는 그 몸뚱아리를 보며 홀로 남은 욕구를 해결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분명 경험이 많다고 했던 창균에게 다음 날 이 혼란스러운 첫경험에 대해 털어놓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이 되돌아왔다. 이새끼 허세는 여전하네 싶고, 여전히 실속은 없었다. 
우리 순규 이제는 여자를 제대로 만났으려나 농이나 지껄이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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