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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달콤한 포도 (일상, 관계)7

달콤한 포도 (7) - 完 7. 주연이의 첫 남자친구는 나를 경계하기도 했고 나도 그 양반 인상이 별로라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어 데면데면 했다면, 두 번째 남자친구와는 둘이 결별한 지금도 가끔 안부 정도 주고받는 친분이 생겼다. 내가 그 게이 친구 ‘산’과 친해져버린 탓이다. 그 술집이 관계의 발단이었으니 언제 한 번 보자고 하던 게 추진이 되어 넷이 만나게 된 것이다. 이성애자 커플을 맞은편에 앉혀두고 나는 잘생긴 게이와 나란히 앉아있자니 더블데이트 하는 것 같고 기분이 묘했다. 뭐 어떤 기류가 있던 건 전혀 아니었지만, 눈치껏 빠져준다고 두 연인 보내놓고 우리끼리 먼저 나오는데 어색하고 그랬다. 하지만 산이 대뜸 우리 둘이 되자마자 혹시 섹스하고 싶냐고 물어봤을 때는 평정심을 잃고 경기를 일으켜버렸다. 짓궂게 웃으며 ‘저랑.. 2021. 11. 9.
달콤한 포도 (6) 6. 제법 탄탄한 체계와 왕성한 활동을 자랑하던 우리 동아리는 자연스럽게 조금 시들해졌다. 차년도에 동아리를 이끌 예정이던 정수 형은 정관이 묶인 채 아버지가 되어버렸고, 나는 알바를 두 개나 늘렸다. 주연이가 연애를 하면서 본인이 동아리에 쏟던 관심이 일부 분산되기도 했지만, 그녀를 동경하며 상상연애의 팬심으로 활동하던 단원들 일부가 애정이 식어 떠난 영향도 분명 있었다. 회장 누나는 졸업과 취직을 준비하며 차기 동아리 운영을 자문하는 정도로 관심을 쏟을 생각이었는데, 본인의 사업을 운영하기로 진로를 틀며 시간이 많이 없어졌다. 졸업을 일 년 늦추고 경영학회에 들어가 네트워크와 기초 실력을 쌓기로 결정했다고. 그 와중에 교육봉사도 다니고, 오래된 애인과 연애도 하고, 정기적으로 할머니 병간호도 병행하니.. 2021. 11. 8.
달콤한 포도 (5) 5. 지난하게 늘어지던 여름이 거의 저물어가던 무렵, 나는 장학금 면접을 조졌고 주연이는 첫 연애를 시작했다. 우연히 알게 된 지인의 추천을 통해 보게 된 사설 장학금 면접이었는데, 진솔함과 진정성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지나치게 솔직한 대화를 해버렸다. 나오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우리는 적선이 아니라 투자를 받을 사람을 찾고 있어요. 이건 우리 직원들이 뼈와 살을 갈아만든 겁니다. 돈이 아니라 혼이에요. 자, 학생은 이걸 받으면 그걸 어떻게 우리 직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갚을 수 있겠어요? 예? 최근에 사옥 매각으로 생긴 투기소득 세제혜택 받으려고 나눔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아 이건 패기가 아니라 싸가지였네. 무슨 생각으로 돈 많은 사람한테 까불었지. 후회막심하고, 또 살짝 겁에도 질렸다. 해코지는 안하.. 2021. 11. 7.
달콤한 포도 (4) 4. 나는 내가 면접에서 제기한 불공평한 혹평에 대해 주연이가 따지려는 줄 알았지만, 그런 건 사실 몰랐기도 했고 알았다고 한들 신경도 안 쓴단다. 다만, 내가 저를 멀리하다 못해 싫어한다는 느낌마저 받았다고. 주연이는 섬세한 친구였다. 그 원인을 아무리 곱씹어봐도 모르겠어서 곰곰이 되새겨보니 면접 때 일이 생각이 났더라고. 표면적으로는 결국 내가 던진 질문에 말문이 막혀 본인이 눈물이 터졌으니, 내가 난처했을 것이라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냐고. 서로의 첫 인상에 대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던 셈이다. 내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건, 여리디 여리면서도 도화살이 끼어있는 그녀의 첫인상이었지 그때의 난처함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건, 그때 일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아닌 스스로에 .. 2021. 11. 6.
달콤한 포도 (3) 3. 간밤에 우리를 누군가 보았는지, 다음 날 소문이 파다했다. 주연이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세간의 관심 대상이었다. 나는 덕분에 디스패치에게 걸린 연예인의 기분을 십분 이해해버렸다. 아 이거 나중에 토론주제로 써야지. 아니 근데 뭘 안다고 별 볼 일 없는 못생긴 애라고 날 부르지, 들으라고 시비거나? 못생긴 건 인정해도 별 볼 일 없는 건 좀 아닌데. 방금 누가 내 자지 얘기했어. 이거 성희롱인데, 아니 그렇게 안 큰데. 내 이름 그거 아닌데 저 병신은 누구 계정 털고 있냐. 둘이 술을 마셨다더라, 쟤네 사귀냐? 아침에 둘이 같이 나왔다더라, 쟤네 잤다더냐? 밤에 막 싫다는데 억지로 끌고 갔다더라, 저 새끼 범죄자네? 조만간 뉴스에서 보겠네? 씨발 군대나 갈까. 주연이는 강한 친구였다. 워낙 인망이.. 2021. 11. 5.
달콤한 포도 (2) 2. 어느 봄날 주연이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다. 얘기 좀 하게 술 한 잔 하자고. 술 먹고 할 얘기라고. 그 느낌이 어째서인지 싸했었다. 다들 만점을 줬는데 내가 빵점을 주었다는 걸 어떤 입 가벼운 임원진이 술김에 털어놓았던 것일까, 그때는 걱정했다. 주연이의 동아리 활동 내용이 제법 훌륭해서 나는 다시금 회장 누님의 안목에 감탄했고, 주연이의 매력과 인간됨에 대해서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 공적으로는 꽤나 가까워지기도 했다. 제법 글을 잘 쓰고, 논리도 탄탄하고, 생각도 깊더라고. 아직 마주보고 토론할 때는 맹한 구석이 있었지만. 하지만 여전히, 왜인지 모를 감정적인 벽이 나에게 있었다. 임원이라는 감투에 취했던 그때에도, 그 아이는 어려운 새내기였다. 주연이의 연락을 받고, 설레는 기분도 있었.. 2021.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