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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달콤한 포도 (일상, 관계)

달콤한 포도 (5)

by 구운체리 2021. 11. 7.

5.
 지난하게 늘어지던 여름이 거의 저물어가던 무렵, 나는 장학금 면접을 조졌고 주연이는 첫 연애를 시작했다.
 우연히 알게 된 지인의 추천을 통해 보게 된 사설 장학금 면접이었는데, 진솔함과 진정성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지나치게 솔직한 대화를 해버렸다. 나오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우리는 적선이 아니라 투자를 받을 사람을 찾고 있어요. 이건 우리 직원들이 뼈와 살을 갈아만든 겁니다. 돈이 아니라 혼이에요. 자, 학생은 이걸 받으면 그걸 어떻게 우리 직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갚을 수 있겠어요?
 예? 최근에 사옥 매각으로 생긴 투기소득 세제혜택 받으려고 나눔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아 이건 패기가 아니라 싸가지였네. 무슨 생각으로 돈 많은 사람한테 까불었지. 후회막심하고, 또 살짝 겁에도 질렸다. 해코지는 안하겠지?
 최근에 돈 문제로 가족이랑 싸우고 난 뒤로, 달에 몇십만원씩 타 쓰던 용돈을 끊겠노라 스스로 다짐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돈이 더 필요했다. 내 주제를 아직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객기를 부렸구나. 우울한 마음으로 동아리 뒷풀이를 가니 사람들이 주연이를 둘러싸고 취조에 가까운 모양으로 이야기보따리를 보채어 풀어헤치고 있었다.
 주연이는 그녀답지 않게 수줍고 조신한 몸가짐으로 성실하게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내가 낄 자리가 없어 나는 회장 누나와 부회장인 정수 형이 따로 이야기하는 조그만 테이블에 끼어 앉았다. 곧 임기도 끝나는 양반들이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고.
 원래는 그쪽 이야기 조금 듣다 내 이야기 하소연도 하고 주연이 얘기도 건너건너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정수 형 이야기가 기대 이상으로 많이 심각했고 또 그래서 흥미로웠다. 내 사소한 고민과 흔한 연애담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주연이에게 대부분의 관심이 쏠린 틈을 타, 소수의 정예 인원은 옆 건물의 조용한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 애 생겼다.
 정수 형은 재수를 했고, 군대를 다녀와 스타트 업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을 하느라 나이 스물여섯에 아직도 학교를 다니며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모범적인 인생의 형태는 아닐지언정 다양한 경험만큼이나 성숙하고 또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체격도 제법 건장하고 외모도 봐줄만해서 모르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낮과 밤의 경계가 뚜렷하고 본인의 유흥에 대한 철학이 명확했다. 방탕한 인간들 중의 모범이랄까.
 그만의 독특한 유흥 철학 중 하나는, 처음 만난 날 여자와 잤더라도 번호를 따고 애프터를 신청하면 원나잇이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곧바로 차인다 하더라도. 하루살이 불이어도 가슴에 피었으면 사랑이라나. 피임에 있어서는 철저했다. 체외 사정 같은 건 물고기 대가리들이나 하는거라며, 동생들에게 남는 콘돔을 찔러주거나 특이한 콘돔들을 추천하고 또 팔기도 하고 그랬다.
 그에게 성교육을 받았던 나를 비롯한 남자들은 일단 추궁하고 봤다. 그렇게 잘난 양반이 뭘 어떻게 했길래 그 질긴 고무를 뚫고 애를 만들었냐. 끝이 뾰족한거냐. 너도 물고기 대가리냐. 형의 표정은 자뭇 심각했지만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중간중간 실소가 흘렀다. 회장 누나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묵묵히 듣고만 있었고, 우리 동아리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던 정혜 누나는 소리가 비는 순간마다 견딜 수 없다는 듯 세상 쌍욕을 퍼부었다.
 정수 형은 말없이 가방에서 어렵게 구했다는 초초박형 콘돔을 꺼내 쓰레기통에 전부 버리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지갑에 콘돔 넣고 다니지 말라고, 따로 보관함에 챙겨 다니라고 조언했다. 부지런히 욕을 하던 정혜누나는 슬쩍 보고 있다가 하나를 챙겼다. 나는 봤다.
 우리가 성매매와 원나잇에 대한 토론을 할 때, 정수 형은 도리어 원나잇이라는 행위를 욕하는 입장이었다. ‘하루 만에 몸을 섞은 게 문제라기보다, 마음이 없는 몸끼리의 박치기는 짐승 같아서 거부감이 느껴진다’ 이런 논리로 그는 원나잇 문화에 거부감을 표했었다.
 우리는 ‘그랬던 니가?’ 하고 그를 꼬집었고 그는 ‘내가 뭐랬어, 니들은 이런 거 하지마라’ 하며 도리어 당당했다. 아이 어머니 되실 분과 그래도 이런저런 궁합이 괜찮았었는지, 애프터 신청을 한 뒤에도 몇 번 더 개인적인 만남을 이어오던 중이라고는 했다. 연애관계에 매여야 할지 말지 고민하던 차에, 다른 쪽으로 단단히 묶여버렸네. 진작에 다른 걸 좀 묶어둘 걸 그랬나.
 당시 스물여덟이던 여자 분은 낙태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녀에게 선택지가 없었다.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이라 잃게 되는 것이 건강 말고도 많았다고 한다. 신의 뜻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겠다고. 그렇게 젊은 부부는 준비 없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관적으로 산 해장용 메로나를 손에 들고 나는 기분이 울적했다. 정수 형이 그 모양으로 아버지가 된다는 것도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딴 게 무슨 탕아들의 교과서야. 좆대가리 함부로 굴리다 인생 엿 된다는 거 증명해주는 흔한 사례집에 한 줄 더 올린거지.
 내가 사랑하던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어떤 막연한 특별함이 그저 평범함으로 주변에 녹아 없어져가는 것이, 내 스스로가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서러웠다.
 술 마셔서 센치해져서 그래.
 나라고 뭐 달리 대단한 사람인가. 이번 달도 집에 손을 벌려야겠구나. 동아리 활동을 줄이고 알바나 과외 자리를 하나 더 알아봐야하나. 이런 사치스러운 고민이나 하는 주제에 무슨 세상의 배고픔을 논하고 삶의 어려움을 논하고 앉았나.
 스스로의 위선에 질려 갑갑한 마음에 나는 까무룩하니 바닥으로 꺼졌다. 그림자에 숨어 웅크린 채 겨우겨우 흘러 집으로 향했다. 가로등마저 끊기고 완연한 어둠에 삼켜지는 분위기에 한껏 취하려는데 주연이 목소리가 들려 우울에서 깼다.
 멀찌감치 주연이가 연인과 걷고 있었다. 천천히.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이좋게 걸어가는데 그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느껴졌다. 내 기분이 그래서가 아니라, 어깨와 발걸음 그리고 내용은 들리지 않는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 톤. 생기가 없었다. 그것도 또 새로운 모습이다마는. 다들 사는 게 힘들구나. 연인과 있으면서도.
 내가 뒤에서 따라붙다 마주치면 어색할 것 같은데, 저 커플이 너무도 느리게 걷는다. 나는 적당한 갈림길에서 돌아가려다 길을 잃었고 그새 다 녹아 없어진 메로나도 잃었다. 손이 끈적이는 게 불쾌했다.
 나는 길치였다.

 정혜 누나는 그 주워간 콘돔을 쓰다가 본인도 찢어먹었다며 또 한바탕 욕을 퍼부었고 정수 형은 어리둥절했다. 사후대처가 잘 돼서 다행히도 다른 문제는 없었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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