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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달콤한 포도 (일상, 관계)

달콤한 포도 (7) - 完

by 구운체리 2021. 11. 9.

7.
 주연이의 첫 남자친구는 나를 경계하기도 했고 나도 그 양반 인상이 별로라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어 데면데면 했다면, 두 번째 남자친구와는 둘이 결별한 지금도 가끔 안부 정도 주고받는 친분이 생겼다. 내가 그 게이 친구 ‘산’과 친해져버린 탓이다. 그 술집이 관계의 발단이었으니 언제 한 번 보자고 하던 게 추진이 되어 넷이 만나게 된 것이다. 이성애자 커플을 맞은편에 앉혀두고 나는 잘생긴 게이와 나란히 앉아있자니 더블데이트 하는 것 같고 기분이 묘했다.
 뭐 어떤 기류가 있던 건 전혀 아니었지만, 눈치껏 빠져준다고 두 연인 보내놓고 우리끼리 먼저 나오는데 어색하고 그랬다. 하지만 산이 대뜸 우리 둘이 되자마자 혹시 섹스하고 싶냐고 물어봤을 때는 평정심을 잃고 경기를 일으켜버렸다.
 짓궂게 웃으며 ‘저랑 뭘 하자는 건 아니고’ 하고 말을 잇는데, 아니 그 말을 먼저 했어야지, 아니지 먼저 한다고 뭐가 다르겠냐만, 내 주변 게이들은 왜 하나같이 성격에 브레이크가 없냐 사는 게 다들 좆같아서 그런가.
 '해봤냐고 물어보는 건 실례일 것 같아서요'
 대뜸 단둘이 있는데 하고 싶냐고 물어보는 것도 만만치 않게 실례인데? 하지만 아직 당황이 가시지 않아 꿀 먹은 벙어리 상태로 그저 걷고 있으니 혼자 말을 이어가더라. 내가 게이는 아닌 것 같은데, 주연이랑 있으면서 별다른 기류가 느껴지지 않는 게 영 어색해 궁금했단다. 본인 촉이 좋으니 그 친구가 한 번 떠봐달라는 부탁을 했기도 하고.
 참 연애라는게 요란하다 싶었다. 어쨌든 나는 그 공신력 있는 게이가 안전인증마크 찍어준 덕에 주연이와도 거리낌 없이 평소처럼 지낼 수 있었으니 나쁠 것 없었다만.
 산은 초면에 관찰하고 평가하고 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아 미안하다며 술 한 잔 사겠다는 제안을 했다. 부모 잘 만나 가진 돈은 많다고. 본인은 게이 중에서도 바텀 쪽이라 다른 걱정은 안 해도 된다며.
 '제가 지금 배가 너무 부른데, 술은 취하려고만 마셔서요. 위스키 사주실거면 따라가구요.'
 그때 나는 다시는 안 볼 돈 많고 건방진 새끼 등이나 쳐먹고 튀자는 생각으로 무슨 작업거는 것 같은 멘트를 호기롭게 질러버렸고, 여태까지 코가 꿰여버렸다.
 아, 연인이 되었다는 건 아니다. 이번에는 아주 잠재적으로라도 성적인 끌림도 없었다, 확실히.

 서른 한 살이 되는 1월 1일, 나는 주연이를 모교 근처의 베스킨라빈스에서 만났다. 저녁에 만나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사정이 있어 술은 못 먹으니 나이도 나이고 일찍 만나 아이스크림이나 먹자고 불렀다. 당시 주연이는 한동안 연애를 쉬다 만난 네 번째 남자친구와 3년 정도 만나는 중이었다. 그녀 치고는 길게 사귄 편이었다.
 주연이는 나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고 한숨을 쉬었다.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아주 피하던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주연은 졸업하고 회사를 잠깐 다니다 돌아와 대학원을 다니던 중이었기에,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기에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남자친구의 설득으로 하고 싶은 공부도 조금 더 하고 연봉도 올리겠다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그대로 식부터 올리게 생겼으니 어딘가 당한 기분마저 든다고 했지만 불행해 보이는 표정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다만, 본인이 나이 들어 연고 없이 떠돌게 되면 내가 운영하는 제주도 별장에 본인 방을 하나 잡고 기간제 이효리처럼 살고 싶다던 실없는 농담이 터무니없어진 것은 좀 아쉽단다.
 주연이는 자신이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것을 걱정했다. 좋은 아내나 연인이 되지 못한다면 떠나면 그만이지만, 자식은 떠날 수가 없으니. 특히 학위 취득 이후에 계획해 두었던 미래에 지워지지 않는 안개가 낀 것 같은데, 그 탓을 자식에게 돌리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본인의 어머니처럼 자식을 탓하는 엄마 품에서 자란 아이가 어떤 우울을 겪는지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대물림하는 미래만큼은 너무도 투명하다는 것이다.
 나는 나답지 않게 그저 긍정적인 말로 위로해주는 것 말고 할 말이 없었다. 아는 것도 없었다. 정수 형 애가 아홉 살인가 되었긴 하지만, 거기야 뭐 연락 잘 안 되고. 친한 친구 중에 부모가 된 경우는 주연이가 처음이라. 또 그 처음이 하필 주연이라.

 내가 산과 위스키 바에 단둘이 다녀온 걸 또 어떻게 알았는지 산의 전 애인이었던 친구가 전화를 해서 지랄을 한 번 했었다. 한참 후에 나를 계기로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아직도 싸울 때마다 번갈아가면서 나한테 전화해서 지랄들을 한다. 연애 활동에 소재가 고갈되면 나한테 지랄하는 유흥을 즐기려고 일부러 싸우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주기적으로 두 놈을 번갈아가며 메신저에서 차단한다. 둘 다 차단했을 때는 나 없는 내 방에 쳐들어와 같이 술을 먹고 있더라.
 왜 나한테 지랄들이냐 진짜.

 주연이는 가족 친지와 아주 소수의 지인들만을 초대하는 간소한 결혼식을 올렸고, 나는 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임신 얘기하며 결혼식 얘기 나왔을 때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길래 내가 대신 이야기를 받았다. 아무래도 이번 남편 될 사람은 나를 썩 좋아하지 않는가보다. 주연이 자식은 한참 뒤에나 구경할 수 있겠네.

 그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나는 그날 밤 특별히 둘 모두의 차단을 풀고 번갈아가며 전화를 걸어 지랄을 했다. 가까운 곳에 살던 산이 견디다 못해 내 집으로 찾아왔고, 다른 친구도 니네 단둘이 술 쳐먹지 말라며 택시를 타고 날아왔다. 밖에서 취하면 위험할 것 같다고 술을 잔뜩 사들고. 마트에서 가격만 보고 집어 온 대용량 샹그릴라는 참 지독하게도 달았다.
 어쨌든 우리는 마셨다. 그리고 취했다.

 그래, 포도는 시지 않아, 나도 알아. 그때 단 거를 너무 먹고 술병이 났어서 그래. 위로를 하려거든 내 몸뚱이에다 해라 엉뚱한 소설 쓰지 말고. 현금으로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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