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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달콤한 포도 (일상, 관계)

달콤한 포도 (2)

by 구운체리 2021. 11. 4.

2.
 어느 봄날 주연이가 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다. 얘기 좀 하게 술 한 잔 하자고. 술 먹고 할 얘기라고. 그 느낌이 어째서인지 싸했었다. 다들 만점을 줬는데 내가 빵점을 주었다는 걸 어떤 입 가벼운 임원진이 술김에 털어놓았던 것일까, 그때는 걱정했다.
 주연이의 동아리 활동 내용이 제법 훌륭해서 나는 다시금 회장 누님의 안목에 감탄했고, 주연이의 매력과 인간됨에 대해서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 공적으로는 꽤나 가까워지기도 했다. 제법 글을 잘 쓰고, 논리도 탄탄하고, 생각도 깊더라고. 아직 마주보고 토론할 때는 맹한 구석이 있었지만. 하지만 여전히, 왜인지 모를 감정적인 벽이 나에게 있었다. 임원이라는 감투에 취했던 그때에도, 그 아이는 어려운 새내기였다.
 주연이의 연락을 받고, 설레는 기분도 있었지만 솔직히 두려운 마음이 더 컸었다. 빵점 줘서 미안해, 나 너 안 싫어해. 나 술 꺾어 마시면 그때처럼 또 때릴 거야?
 알려진 바 그리고 겪어온 바 주연이는 술자리의 미친년이었다. 재수를 해서 같은 학번 친구들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동기 남자애들은 주연이 형이라고도 불렀다. 태생적으로 흥이 많은데 평소에는 숨기고 사는구나. 술이 점점 들어갈수록 성격도 논리도 뱃사람처럼 거칠어졌다. 음담패설, 생떼, 고성방가, 맥락 없는 인신 비방, 그러고는 야야 기분 풀어 오늘은 내가 쏜다! 언제는 어디서 났는지 목탁을 들고 와서 두들기다가 옆자리에서 헛소리하는 아저씨 머리통을 두들기려는 것을 뜯어말린 적도 있었다.
 주량은 대략 소주 네 병. 만취한 주연이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빈 잔이 보이면 술을 강권하고, 빈 병에 대고는 노래를 부르고, 밖으로 끌고 나가면 해괴한 춤을 추었다. 신나게 뛰어 놀다 힘이 다하면 그 자리에 그대로 얌전히 몸을 말고 잠이 들었다.
 개 같았다.

 여러모로 두려움에 떠는 나를 주연이는 마른 안주를 파는 맥주 집으로 데려갔다.
 제가 용기내서 연락했으니까 술은 선배가 사요.
 나는 임원이고 선배니까, 쿨한 척 콜은 했지만, 그래봐야 스물 한 살, 과외로 버는 돈이 전부였다. 소주만 네 병을 먹는 주연이가 맥주는 또 얼마나 먹을까, 생각이 많았다. 그러는 사이 주연이는 이미 살얼음이 꽁꽁 언 잔에 담겨 나온 생맥주를 절반 가까이 단숨에 비우고 얼굴을 힘껏 찌푸리고 있었다. 어려서 그런가 저렇게 막 얼굴을 구겨 쓰는데도 평소에는 주름 하나가 없네.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과 탄식이 섞인 의성어를 낮게 뱉고 말았다. 주연이는 역류하는 트름을 자기 코로 흘려보내느라 그 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았고, 나에게는 살랑이는 콧바람을 타고 그 비릿한 가스가 섞인 숨의 향이 옅게 전해졌다.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동아리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주변 식당은 어떤지, 수업은 또 얼마나 지루한 지, 등등 소소하게 사는 얘기들. 일상 대화의 언변이 좋지 않은 편인 나는 주로 수동적으로 끌려다니고 있었고, 주도권을 쥔 주연이는 술이 들어갈수록 공고하게 나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정신 줄을 붙잡고 있던 나는 언제 본론을 꺼내려나 초조해하던 참에, 주연이가 면접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그러는 거 좀 위험했어요 선배, 알아요?
 세 번째 오백미리 잔을 비우고 화장실에 다녀온 주연이가 두서없이 치고 들어왔지만 본능적으로 면접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얘가 지금 화를 내려나, 다시 눈물을 보이려나,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던 찰나 주연이가 대뜸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리고 임마, 너 빠른년생이라며? 내가 누나인 거 알아?
 주연이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내 볼을 꼬집었다. 이제 기세에 짓눌린 나는 선배고 임원이고 남자고 뭐고 그저 갸녀린 토끼 한 마리였다.
 예 선생님 알아보겠습니다. 죄송한데 그것 좀 놔주세요.
 내 수그린 기세에 만족한 듯 주연이는 자리로 돌아가 호탕하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내가 실수했어요, 선-배-님! 친동생이랑 헷갈려서. 자 화해의 짠 한 번 하고! 응, 어서? 옳지.
 안 먹으면 다시 지랄하겠지. 그리고 너 외동이잖아. 내가 고통스럽게 두 번째 잔을 밀어넣는 사이 주연은 아마도 그날의 본론이었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의외의 시작과 의외의 방향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밤과 이야기는 깊어졌다.

 사실 술자리 대화가 으레 그렇듯 구체적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처음 주제와 이어지는 몇 개의 가락은 기억하지만, 대화라는 형식으로 각자의 의식이 악기가 되어 즉흥적인 재밍을 하는 것처럼 그저 내키는 대로 입을 놀렸다는 것 밖에는. 분명 유익하고 생산적인 기분이었는데, 남는 건 그날의 주연이 밖에 없네. 아, 그 날 길에서 주운 짐 나르는 지게도.
 돌아오는 길에 주연이는 그녀답지 않게 엉엉 울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한껏 우울함에 기분이 들떠 평소 주량의 두 배가 넘는 술을 마시고도 기분이 남아 걸어오는 길에 캔맥주를 더 마셨다. 그때의 나는 걸어다니면서 술을 먹는 그런 건 내일이 없는 알콜중독자들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주연이가 뜻밖에 만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자기 자취방 문턱에서 몸을 말고 잠들지 않았더라면, 술에 취하고 젊음에 취하고 서로의 대화가 만드는 기분 좋은 화음에 취한 우리가 어떤 밤을 보냈을 지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술 때문에 전원이 꺼진 주연이는 몸을 펴는 법도 잠시라도 정신이 돌아오는 법도 없었다. 그저 고장난 오뚜기처럼 머리통만 달랑달랑 할 때 그 모습은 진짜 웃기게 못생겼다. 이게 낮에 봤던 그 사람이랑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여자 후배 혼자 사는 자취방 비밀번호를 캐묻기에 새벽 두 시는 너무 수상쩍은 시각이었다. 그렇다고 술에 떡이 된 여자 인간 덩어리를 들어 나르자니 어떻게 힘점을 잡아도 균형이 안 맞거나 힘이 모자라거나 성적으로 불건전했다. 누구라도 불러야하나 고민하던 순간, 쓰레기장에 버려진 지게가 보였다. 21세기에?
 긴 철봉이나 큼지막한 스티로폼 등과 같이 있는걸 보니 회화과 친구들이 내다버린 소품더미 같았는데, 제법 튼튼했다. 주인은 없는 것 같았는데, 그때는 아무래도 좋았다. 쓰고 돌려놓으면 되지.
 나는 어설프게 그녀를 내 자취방까지 싣고 와 겨우 뉘였다. 흥건한 땀이 식자 초봄의 선선한 바람이 쓰다듬고 지나간 살결에 닭볏이 올랐다. 괴상한 자세로 잠든 그녀의 못나게 구겨진 얼굴을 보며 나는 어딘가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는 벽에 기대어놓은 지게를 보며 그동안 자신해오던 스스로의 합리성과 이성의 경계가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고, 알 수 없는 유쾌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혼자 낄낄대며 웃었다.
 야 이거 튼튼하네. 주인 없으면 내가 써야겠다.
 술에 취해 미친 사람처럼 웃다보니 허리가 너무 아프고 피로가 몰려와 그대로 엎어져 잠이 들었다. 지게는 내가 10년 동안 애지중지 보관하다 주연이 결혼 선물로 주었고, 예의 그 목탁을 답례로 받았다. 그 목탁이 세상에 본인 물건이었구나, 그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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