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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달콤한 포도 (일상, 관계)

달콤한 포도 (1)

by 구운체리 2021. 11. 3.

0.
 애써 밝은 척을 하는 게 아니고 진짜로 상관이 없는 거야 이 머저리들아.
 애초에 내가 니네보다 주연이랑 훨씬 친한데, 그 소식을 너네한테 처음 들었겠니? 뭘 안다고 위로를 해. 아니 내가 지금 조금 우울한 건 맞는데, ‘내가 짝사랑하던 여자가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게 되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내 아이는 당연히 아니고, 아닌 거 알면 묻지를 말고. 헛소문에 살 붙여서 디테일 만들지 말라고. 아이고 염병할.
 덕분에 간혹 진심에서 우러난 응원의 눈빛을 보내는 덜 가깝고 더 선량한 지인들이 나는 더욱이 불편하다. 경솔한 사마리아인들 같으니. 조금이라도 언짢은 기색을 비쳤다가는, ‘당신이 이해하세요, 아시잖아요?’ 서로 눈빛 교환하면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줄 그 미필적 호의가 아른거려 골이 아프다. 그래서 입 다물고 있으면 진짜인 줄 알잖아. 아 좆같네.
 내가 진짜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니. 아니 근데 굳이 설명을 해야 하니?

1.
 주연이는 닥스훈트를 닮았다. 하관이 길쭉한 게 그 개처럼 생겼다. 그런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스스로도 본인을 소개할 때 우스개로 종종 써먹곤 했는데, 그런 털털함이 또 매력이었다. 와중에 제법 예뻤다. 그래서 사람들이 편하게 놀렸다. 저주받은 사진 재주와 얼굴 막 쓰는 성격 때문에 정적인 그림에는 담기지 않는 동적인 매력이 뚜렷했다. 첫인상에서는 느낄 수 없지만, 직접 몇 마디 나누다보면 편안하게 마음에 스며들어 어느 구석에 흔적을 남기고 가는 그런 친구였다. 어디에 있더라도 무리의 중심에 그녀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성격만큼이나 미모의 덕이다.
 내가 대학 시사토론 동아리의 활동부장을 맡았던 시절, 한 학번 후배로 들어온 주연이를 처음 만났다. 그때 나는 그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나처럼 그녀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은 있었지만, 우리 동아리에 어울리지 않는 류의 사람이라고 섣불리 판단해버린 것이다.
 곧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각자 서로에 대한 정체모를 끌림과 벽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래봐야 스물하나, 무엇 모르는 어린아이인 건 똑같으면서 그때 나는 너무나 어른이고 싶었다. 기껏해야 선출직도 아닌 활동부장 정도의 임명직을 맡으면서 품었던 대단한 사명감이, 나의 알량한 어른-됨에 대한 자의식을 한껏 띄워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낯 부끄럽지만 그때의 나는 제법 진지했다. 동아리 안에서 만큼은 나는 일과 개인의 경계가 뚜렷한 사람이고자 했고, 다른 이들도 그래주기를 바랐다.
 친구란 야전침대와 같이 서로에게 쉴 곳이 되어주되 싸우는 법을 잊게 할 만큼 안락하지는 않아야한다, 뭐 이런 어설픈 지론으로 사람들과 일정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 무렵 되도 않게 니체를 읽어서 그렇다. 어쨌든 시사토론 동아리니까. 사회의 다양한 안건에 대해 칼처럼 날카롭게 논리를 다듬고 서로의 빈 곳을 치열하게 공략해 그 누구와 논리로 겨루더라도 밀리는 일이 없도록 등을 맞대는 사이가 되어주었으면 했다. 동아리의 임원진이라면 더더욱.
 어딜 연애를 해?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생각한 주연이의 첫 번째 문제는, 그 보편적인 매력이 과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까지도 연인으로 꼬셔낼 것만 같았다. 물론 나는 진지한 마음가짐의 임원으로써 객관적인 판단을 하고자 했으니, 직무 역량만 충분하다면 부수적인 문제는 임원진에서 조율하는 게 맞다. 그런데 나는 주연이의 그 역량 자체에 대해서도 입부 면접 때부터 매우 회의적이었다. 압박질문으로 살짝 운을 떼니까 바로 눈물 쏟으며 헛소리만 하다 나간 친구를 토론 동아리에 받겠다고?
 그때 나는 거의 최하점을 주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전부 최고점을 주어 주연이는 차석으로 동아리에 들어왔다. 내가 존경해오던 동아리 회장 누나의 지지와 설득이 아니었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다 못해 화까지 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지 않았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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