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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달콤한 포도 (일상, 관계)

달콤한 포도 (3)

by 구운체리 2021. 11. 5.

3.
 간밤에 우리를 누군가 보았는지, 다음 날 소문이 파다했다. 주연이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세간의 관심 대상이었다. 나는 덕분에 디스패치에게 걸린 연예인의 기분을 십분 이해해버렸다. 아 이거 나중에 토론주제로 써야지. 아니 근데 뭘 안다고 별 볼 일 없는 못생긴 애라고 날 부르지, 들으라고 시비거나? 못생긴 건 인정해도 별 볼 일 없는 건 좀 아닌데. 방금 누가 내 자지 얘기했어. 이거 성희롱인데, 아니 그렇게 안 큰데. 내 이름 그거 아닌데 저 병신은 누구 계정 털고 있냐.
 둘이 술을 마셨다더라, 쟤네 사귀냐? 아침에 둘이 같이 나왔다더라, 쟤네 잤다더냐? 밤에 막 싫다는데 억지로 끌고 갔다더라, 저 새끼 범죄자네? 조만간 뉴스에서 보겠네?
 씨발 군대나 갈까.

 주연이는 강한 친구였다. 워낙 인망이 좋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그녀를 믿어주고 편을 들어주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충분히 강해서 정면으로 돌파할 힘이 있었다. 물론 나도 그간의 평판이 나름 건실한 편이라, 내 편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우리동아리는 한 몸이 된 것처럼 이 문제에 매달렸다. 공동의 적이 생긴 것이 반갑기마저 했다.
 아주 날카롭게 별러진 대자보는 여러 사람들의 첨삭과 검토를 거쳐 세상에 다시 없을 명문으로 거듭났고, 우리 학교에 국한된 단편적인 사건을 너머 대학 그리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저열한 관음증과 역겨운 상상력을 대상으로 일침을 가했다. 그 즈음 구설수에 휩싸여 극단적 선택을 한 연예인의 온기가 아직 포털에 남아있던 때였다. 꽤 많은 사람들이 각종 SNS에서 그 글을 공유하고 인용하며 파급력이 생겼고 주연이는 다시금 유명해졌다.
 한편 나의 존재는 금방 지워졌다. 아직도 주연이를 가스라이팅 당한, 내지는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진 피해자로 몰아 나를 공격하는 정신병자들과 그녀와의 상상연애를 방해받은 머저리들을 빼고는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았다. 대중성이 부족한 존재였다. 존재감 자체가 작다고 해야 할까. 애초에 그들이 원했던 상품은 ‘주연이’라는 이미지 뿐이었다.
 그래서 그게 누군데? 아니라며? 안 했다며? 못 했다며? 병신. 그것도 작대.
 아무튼 확실히 지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강제로라도 친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심지어 주연이가 답지 않게 너무 미안해해서 맨 정신에 둘이 보는 게 처음엔 너무 어색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낯선 시선에 대응하면서, 혹은 니네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냐고 몰아가는 친구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어느 순간 서로 벽을 허물어 버렸다. 뭐 우리가 사귀면 니들이 어쩔건데?
 연인이 된 것은 아니다. 분명 서로 인간적인 호감은 있었지만, 연애의 케미스트리는 아니었다. 내가 동아리 임원이라는 책임감에 과몰입해서, 혹은 자존감이 낮아서 스스로의 감정을 속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녀와 연애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 적도, 그래 있었다. 우리는 분명 대화가 잘 통하고 잘 맞는 취미도 제법 많은 서로였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우리의 숨결이 오가며 만든 흐름이 연애의 공기는 분명 아니었다.
 성적인 끌림이 없었냐, 그건 아니다. 까놓고 말해서, 클럽에서 모르는 사이로 서로 만났으면 난 주연이랑 하고 싶었을거야. 물론 주연이 의사도 중요하지만 일단 내 생각은 그렇다고. 어떤 사회적인 벽, 스스로 고상한 문화인이라는 위선이 나를 붙잡아둔 것은 맞지. 그건 주연이 쪽도 마찬가지 아니야? 내가 성적 매력이 부족한 게 이유라고 몰아가고 상상하는 게 너를 즐겁게 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니,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거니?
 그래 그러는 너는 주연이랑 한 번 자보고 싶다고 나한테 그 지랄을 했으면서 말이나 한 번 걸어봤고?

 연애적인 끌림이라는 것은, 다른 인간적인 매력들과 구분되는 무언가이다. 예쁜 얼굴을 보고 싶고, 귀여운 목소리를 듣고 싶고, 대화에 취해 깔깔 웃고 싶고. 그런 감각적인 끌림들. 혹은 손을 잡고 싶고, 그윽하게 눈빛을 마주하다 포옹을 하고 싶고, 입술을 맞대고 혀를 섞고 또 다른 것도 이것저것 섞고 싶고. 그런 성적인 끌림들. 그 사이의 관계의 지속에 대한 어떤 계약적인 것. 두 사람의 연애에는 본능적 케미스트리의 조화와 비본능적 약속 이행의 성실함이 필요하다. 나와 주연이는 사이에는 둘 다가 없었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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