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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달콤한 포도 (일상, 관계)

달콤한 포도 (6)

by 구운체리 2021. 11. 8.

6.
 제법 탄탄한 체계와 왕성한 활동을 자랑하던 우리 동아리는 자연스럽게 조금 시들해졌다. 차년도에 동아리를 이끌 예정이던 정수 형은 정관이 묶인 채 아버지가 되어버렸고, 나는 알바를 두 개나 늘렸다. 주연이가 연애를 하면서 본인이 동아리에 쏟던 관심이 일부 분산되기도 했지만, 그녀를 동경하며 상상연애의 팬심으로 활동하던 단원들 일부가 애정이 식어 떠난 영향도 분명 있었다.
 회장 누나는 졸업과 취직을 준비하며 차기 동아리 운영을 자문하는 정도로 관심을 쏟을 생각이었는데, 본인의 사업을 운영하기로 진로를 틀며 시간이 많이 없어졌다. 졸업을 일 년 늦추고 경영학회에 들어가 네트워크와 기초 실력을 쌓기로 결정했다고. 그 와중에 교육봉사도 다니고, 오래된 애인과 연애도 하고, 정기적으로 할머니 병간호도 병행하니 어디서 시간이 그렇게 나는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동아리는 결국 정혜 누나가 회장을 맡았고 나와 지금 회장 누나가 종종 도와주는 식으로 일 년 호흡기를 더 달았고, 그 뒤의 기수에는 같이 활동한 친구들도 잘 없고 해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부실에 현판이 붙어있는걸 보면 망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주연이는 약 2년 정도 연애를 하다 졸업 준비를 할 학년이 되기 전 겨울 첫 연애를 끝냈다. 미적지근한 첫 연애가 끝난 날 주연이는 대뜸 밤 열한시에 전화해서 술 먹자고 나를 불러냈다.
 야 나 오늘 깨졌다. 술 먹게 나와. 니가 사는 거니까 지갑 챙기고.

 나는 그 사이 술이 늘었고 주연이는 능청이 늘었다. 연애를 하면서 도리어 다른 남자들한테 플러팅하는 기술과 밀고 당기는 유연함을 배워온 것 같았다. 그 전 남자친구는 유명한 바람둥이였는데, 주연이 만나는 동안만큼은 꼼짝 못하고 매여 살았다고 들었다. 그 좋아하는 클럽 출입을 스스로 끊느라 클럽 친구들과 연까지 끊겼다는 소문은 사실인 것 같았다. 아무리 시간과 힘을 쏟아도 주연이가 온전히 자기 품에 묶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을 느꼈기 때문이겠지.
 그런 야생성이 그녀의 매력이라고 떠들고 다니며 한 달 내로 길들여보겠다고 큰소리치다 본인이 2년 동안 길들여져 버린 바람에, 살은 찌고 기술은 줄고 눈은 높아지고 꽤나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나와 주연이는, 우리가 구설수에 올랐던 그때 그 맥주 집에 다시 찾아갔다. 그 사이 둘이서 몇 번 술을 먹은 적은 있지만, 함께든 각자든 그 집을 찾아간 건 그 날 이후 처음이었다. 특색도 맛도 없이 가격만 싼 술집이 여태 버티고 있는 게 용하기도 하지. 추억팔이도 할 겸. 다만 이번에는 소주를 시켰다. 그 사이 소주 값이 오르고 요상한 향이 들어간 소주들을 팔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전국 각지의 소주를 서울에서도 팔기 시작했다.
 나는 서울 태생이고 주연이는 광주였다. 우리는 잎새주와 한라산을 시켜서 섞어 마셨다. 서울이고 뭐고 내 마음의 고향은 제주도다. 모자란 사정에 기분 내서 비행기타고 놀러간다고 가는 곳이 항상 제주도였고, 항상 뜻밖의 재미를 선물해주는 곳이라 나는 경제적 자유를 얻게 되면 제주도 남쪽에 별장을 얻어 적을 옮길 계획이었다. 내 고향은 육신의 요람이 아닌 정신의 무덤으로 정의되기를 원했다.
 뭐 피차 소주 맛을 구분할 미각은 없었다. 소주를 소주와 섞는 건 더욱 술 미치광이가 된 주연이의 괴상한 주도이기도 했고, 지역 간의 화합이라는 명분으로 술자리의 발화에서 주목을 끄는 일종의 화술이기도 했다.
 어쨌든, 마시면 취한다는 게 중요했다. 우리는 마시고, 취했다.

 주연이는 자꾸 이전에는 하지 않던 자기 지난 연애의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징징댔고, 나는 처음 30분은 덮어놓고 편을 들어주다가 듣고만 있자니 지루해져서 한 병 정도 들어간 뒤로는 나란히 지랄을 하기 시작했다. 반쯤은 주연이에게 퍼붓는 잔소리이기도 했다.
 너는 뭐 별로 하고 재미도 못 느끼는 연애를 다시 하겠다고 지랄지랄. 웃기지 마 다시 할 거잖아, 저기 지금 너 쳐다보는 쟤가 사귀자면 사귈거지 너? 근데 잘생기긴 했다, 조금 게이같이 생겼는데. 언제 이렇게 얼빠가 됐니.
 그 와중에 사람 촉이 참 무서운 게, 주연이는 얼마 안 가 그 남자와 함께 있던 다른 남자와 두 번째 연애를 시작했고, 내가 말한 남자는 게이가 맞았다. 직접 먼저 커밍아웃을 한 건 아니고, 주연이를 통해 건너들었다. 심지어 내 친한 친구의 전 애인이란다.
 그 게이 녀석이 후에 말하길, 전 애인의 친한 남자인 친구라 기억해뒀던 얼굴이 또 나름 유명한 여자랑 둘이서 술을 먹고 있으니 눈길이 가 몇 번 쳐다봤다고. 본인의 민감한 감각에 따르면 우리 둘 사이에 로맨틱한 기류는 없는 것 같으니, 주연이를 노린다면 지금이 기회일 것 같다고 같이 있던 친구에게 귀띔해주었단다. 사람 촉이 참 무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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