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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바다에 빠진 목탁 (일상, 관계)8

바다에 빠진 목탁 - (8) 完 8. 알음알음 알게 된 모교의 대학원생과 연애를 하다보니, 학문 그 자체와 학위가 불려주는 나의 몸값 모두에 동경이 생겼다. 동경은 구체적인 욕심과 계획이 되고 어느 새 현실이 되어버렸다. 회사는 내가 학위를 받고 돌아오면 더 좋은 자리를 준비해두겠노라 독려했지만, 어제의 동료를 내일의 상사로 만나게 되는 것도 후임으로 만나게 되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또 기왕 삶을 옮기는 거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싶은 욕망도 있어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로 많이 다녀보지 못한 해외를 향한 동경을 실현해보고 싶었다. 퇴직금 까먹으며 간간히 여행을 다니면서 그 동경은 또한 구체적인 욕심이 되었으나, 차근차근 쌓여가던 계획은 계획에 없던 사고가 끼어들어 무너졌다. 임신을 해버린 것이다. 어디서.. 2021. 11. 17.
바다에 빠진 목탁 - (7) 7. 두 번째 연애의 시작과 끝은 예의 그 술집이었다. 첫 연애가 끝난 날 바다를 불러 술을 먹는데,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던 남자 둘이 수군거린다 싶더니 바다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 내 번호를 따갔고, 연락을 주고받다 연인이 되었다. 저돌적이고 화끈한 성격의 남자라 사귈 때도 헤어질 때도 쿨했다. 본인의 욕망과 표현에 충실한 사람이라 함께 있으면서 나도 많은 것을 배우고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나의 욕망을 살피고 존중해준다는 느낌은 받지 못해 일 년 정도 연애 기간을 채우고 권태가 오자마자 외로워져서 헤어졌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즐거운 기억이 많은 제법 재미있는 연애였다. 사람 자체가 유머 감각도 뛰어나기도 했고, 워낙 관심사가 많아 나에게 그 짧은 시간에 다양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던 것이.. 2021. 11. 16.
바다에 빠진 목탁 - (6) 6. 엄밀히 말하자면 J가 첫 번째 연인은 아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스무 살 재수하던 시절 교제하던 친구를 연인으로 세어야겠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련하고 또 가슴이 아리다. 첫사랑이라고 하기에 억울할 것은 없었다. 다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다기 보다 그때의 상황을 사랑했던 것 같고, 그 시절의 우울함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 친구의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어렸고 외로웠고 우울했다. 집에 돌아가서 잠들기 전에는 항상 엄마가 한 마디씩 나의 우울을 더욱이 안으로 쑤셔넣기 위해 찾아왔다. 본인의 우울을 나에게 꺼내보이며 나의 우울을 용납하지 않았고 괘씸하게 여겼다. 하루는 울고 있는 나에게 그냥 나가서 몸이나 팔라고 쏘아붙였고, 나는 이미 창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 2021. 11. 15.
바다에 빠진 목탁 - (5) 5. 소문은 상상력을 먹고 자란다. 상상은 귀에서 다시 입으로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빈 부분에 살을 덧대는 역할을 한다. 상상이 쉬어가는 그 공백을 채워주고 또 입 밖으로 뱉는 과정에 도덕적인 불편함을 심어주면 길 잃은 소문은 곧 그 올바른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나는 보란 듯이 바다와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단둘이 밥을 먹었고 캠퍼스에서는 바짝 붙어서 길을 걸었으며 종종 술도 같이 먹었다. 우리를 연인으로 인식하는 모르는 사람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바다의 매력을 평가하는 사람이나 우리의 연애를 관음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별러진 대자보를 통해 혼꾸녕을 내줬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내 편이 되어주었지만, 간혹 충고를 덧붙이기도 했다. 마음이 없는 남자와 단둘이 술을 먹거나 특.. 2021. 11. 14.
바다에 빠진 목탁 - (4) 4. 동아리는 의외로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내가 감정이 북받친 상태에서도 논리적으로 대답을 이어가며 책임감 있게 면접을 끝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못해 초인적으로까지 느껴졌다나. 죄책감으로부터의 가산점을 받은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중에 면접관 중 하나가 농담이랍시고, 그 와중에 바다가 나한테 점수를 낮게 줘서 내가 수석을 놓쳤다고 얘기해줬다. 나이도 많은 게 철딱서니 없이 그런 말이나 옮기고 다니고 토론 동아리 임원을 하냐. 나는 혀를 찼고, 아니나 다를까 그 인간은 딱 그 해, 어린 나이에 조준 잘못해서 애 아빠 되고 인생 꼬였다기에 꼬시다고 신나게 비웃었었다. 내가 나중에 그 꼴이 똑같이 날 줄은 모르고. 그 와중에 바다 이 괘씸한 새끼. 미운 마음이 들기보다 친해져서 괴롭히고 싶어졌다. 애.. 2021. 11. 13.
바다에 빠진 목탁 - (3) 3. 내가 첫 연애를 하기 전, 예의 그 토론 동아리에서 친해진 남자 선배가 있었다. 빠른 년생에 현역으로 들어와 나보다 나이로는 어렸지만, 개중에 나이치고 그나마 성숙한 편이기는 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들을 전부 통틀어서 가장 또라이 같은 사람이었다. 특유의 말과 행동 습관이 몇 가지가 있어 주변 사람들이 성대모사 하듯이 그걸 유행어처럼 따라하는데, 정작 본인은 그게 자신인 줄을 몰랐다. 완전히 생뚱맞은 지점에서 극도로 분노하는 성격은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목탁 들고 다니는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얘는 무슨 지게를 지고 다닌다. 항상 로봇처럼 똑같은 표정으로 술이 만취해도 얼굴 표정이나 색은 하나도 안 변하는데 몸이랑 정신은 취해서 남들이 시키는 대로 별 이상한 .. 2021.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