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 연재/바다에 빠진 목탁 (일상, 관계)

바다에 빠진 목탁 - (8) 完

by 구운체리 2021. 11. 17.

8.
 알음알음 알게 된 모교의 대학원생과 연애를 하다보니, 학문 그 자체와 학위가 불려주는 나의 몸값 모두에 동경이 생겼다. 동경은 구체적인 욕심과 계획이 되고 어느 새 현실이 되어버렸다. 회사는 내가 학위를 받고 돌아오면 더 좋은 자리를 준비해두겠노라 독려했지만, 어제의 동료를 내일의 상사로 만나게 되는 것도 후임으로 만나게 되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또 기왕 삶을 옮기는 거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싶은 욕망도 있어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로 많이 다녀보지 못한 해외를 향한 동경을 실현해보고 싶었다. 퇴직금 까먹으며 간간히 여행을 다니면서 그 동경은 또한 구체적인 욕심이 되었으나, 차근차근 쌓여가던 계획은 계획에 없던 사고가 끼어들어 무너졌다. 임신을 해버린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모르겠다. 습관이 되어버린 관계에 마무리 점검을 꼼꼼히 하지 않은 탓이겠지. 긴 여행을 다녀오기 전 일이 생겼고, 한국에 돌아와서야 내가 여행 동안 생리가 멈춰있던 게 약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 사후대처를 할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결혼을 한다면 이런 사람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오긴 했지만, 이렇게 묶여버릴 생각은 없었는데.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갖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기분이 착잡한데 몸이 몸이라 술도 못 마시는 게 열불이 났다.
 하루에 몇 번씩 이물감이 드는 배를 만져보며 이 기생덩어리를 어쩌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가, 또 나 좋자고 저지른 일에 휘말린 죄 없는 생명에 대한 가여움이 덮쳐와 조울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남편 될 사람은 기꺼이 그리고 고스란히 그 피해를 받아냈다. 그만큼 나에게는 다시 감정적인 빚이 쌓여갔다. 나는 평생 갚지 못할 빚에 허덕이다 늙어가겠지.

 요새 나는 쉽게 우울해진다. 좀처럼 감정을 주체하는 게 쉽지 않다. 사람들은 이제 나를 내가 아닌 뱃속의 무언가와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거울을 보면 몇 년 전 연을 끊어낸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내 안에서 죽여내고 싶었던 그 모습이 그대로 거울에 비쳤다. 나는 결국 나 스스로를 죽여내고 싶었는가보다. 결혼을 준비하고 집을 합치기 위해 짐을 정리하며 나의 옛날 상자들을 전부 다시 열고 버리고 합치는 작업들을 해나가며 나는 나를 지웠다.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 마지막은 목탁을 바다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나의 바다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내 지난 날의 이야기들을 전부 고요하게 품은 채로. 그 속에 자라지 못한 나의 환영이 나를 반기는데, 몸의 변화로 인한 호르몬 탓인지 울컥한 기분이 들어, 이전처럼 나의 새로운 세상을 바다에게 보여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우리가 즐겨듣던 노랫말처럼, 나는 내 낡은 서랍 속에 바다를 넣고 닫아두었다. 긴 시간 후에 내 몸이 낡고 닳은 때에 다시 찾게 된다면, 그땐 오롯이 나인 채로 편히 두 눈 감고 잠겨 죽어야지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