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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당신의 이웃 vol 2. 변명 (범죄)8

당신의 이웃 vol.2 - (8) 完 X. 사람들은 나의 허물을 그 어느 때보다 열렬히 소비한다. 나의 물리적인 죽음이 집행이 되고 나아가 생중계 되기를 원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며, 각자가 원하는 바에 따라 내가 특정한 방향으로 행동해주기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진작에 죽어버렸기에, 내가 어떤 행동을 선택하던 그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매일 밤 나를 두들겨패면서 본인들의 파괴적인 욕구와 도덕적인 성취감을 동시에 맛보려는 동료 수감자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정말로 내 죽음이 법에 의해 집행이 된다면 가장 고상하고 편안한 모양이 될 것이다. 마취에 쓰이는 하얀 액체를 먼저 주입하는 과정은 내가 그동안 행해 온 방식과 일면 닮아있다. 물론 그 뒤로 숨통을 조이거나 목뼈를 부러뜨리는 과정은 없겠지만. 그렇지만 .. 2022. 2. 1.
당신의 이웃 vol.2 - (7) 7. 예슬이는 꽤 유명한 기업 상무의 딸이었다. 본처는 아니고 공공연한 첩의 딸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정서적으로 궁핍했다. 자신의 처지를 조잘대며 설명했지만 나는 듣고있지 않았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차라리 거기서 자수를 하는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내 여섯 번째 사랑은 대학 동문 중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원치않는 애를 뱄다고 했다. 남자친구는 조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조부모가 남자친구를 너무도 끔찍하게 여긴 나머지 둘 사이의 관계를 시시콜콜하게 파고들어 간섭을 하며 그것을 사랑과 관심으로 포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일방적인 애정에 대한 대가까지 요구한다고 했다. ‘아가 너한테 이 정도는 기대해도 되지 않겠니?’ 도저히 임신이 될 만한 실수.. 2022. 2. 1.
당신의 이웃 vol.2 - (6) 6. 나는 전역 후 공 상병이 살던 동네에 집을 구해 그의 여자친구 병주를 만났다. 그때 이름을 처음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며 집안 살림을 거덜내고 병주를 때렸다. 병주는 그런 금수만도 못한 치도 아비라고 내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르고 있었다. 만약 사고가 아니었다면, 그건 자살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에 떠있는 사람 배를 칼로 후벼놨다면, 그래서 그 사람이 발버둥을 포기하고 가라앉아 익사했다면. 찌른 사람이 죽인거야, 스스로 빠져 죽은거야? 칼이 아니라 주먹으로 머리를 후드려팼다면 어떤데. 아니면 기껏 발버둥치는 사람한테 ‘구조대는 오지 않고 당신의 체온은 점점 떨어져 결국 예정된 끝을 맡게 될 것이며 괜한 저항은 고통의 시간만 연장할 뿐’이라는 악담을 퍼부었다면. 나는 공 .. 2022. 1. 27.
당신의 이웃 vol.2 - (5) 5. 나름 조용히 산다고 살았는데, 또래 남자들에 비해 스스로를 과도하게 포장하지 않으며 때론 과격한 생각들을 거침없이 뱉곤 하는 이미지가 신비롭게 팔려져, 뜻밖에도 몇명의 여자들과 더 인연이 닿았다. 그저 사회성이 부족해 대놓고 못할 말을 못 가리는 것 뿐이었지만. 특정 정치인의 자서전을 읽고 있는 모습이 또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 같다. 그때 즈음엔 주하 선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원의 실마리를 찾았을까. 아직도 발버둥의 미학을 믿고 있을까. 얕은 관계의 반복 속에서 문득 나를 여기까지 밀어낸 파도를 만든 그녀의 작은 발버둥을 나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쾌락에 있어 몸과 정신의 만족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각자의 완성형을 엿보게 될 즈음 양쪽 모두를 마무리하고 군대에 가기로 했다. 대단한.. 2022. 1. 25.
당신의 이웃 vol.2 - (4) 4. 길어야 몇개월일 줄 알았던 김 부장님의 지방파견은 정권교체에 따른 개발계획 확장으로 최소 5년이 연장되었다. 바뀐 정권이 다음 대선도 승리하며 균형발전의 기조를 유지한다면 10년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김 부장님은 견디다 못해 조그만 원룸을 따로 얻기로 했다. 그만큼 집안 사정은 어려워졌고, 박 여사는 늘어가는 지병만큼 날이 바짝 섰다. 고등학교 생활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집단 환각에라도 빠진 것처럼 선생들의 주도 하에 모든 하루의 대화가 대학으로 시작해 대학으로 끝이 났다. 학생들은 그 혼돈의 충실한 일부가 되거나 아주 벗어나거나 하나를 확실하게 선택해야했다. 애매하게 걸쳐있는 학생들을 밀어내든지 당기든지 하기 위해 온 세상이 지랄을 떨었다. 자신의 세계를 명확히 정한 이들은 서로 다른 세계의.. 2022. 1. 20.
당신의 이웃 vol.2 - (3) 3. 중학교 3년은 교내 도서관에서 살았다. 당시 교장은 국공립 학교 중 최고의 장서수준을 갖추기 위해 꽤나 많은 공간을 할애했고, 도서구매신청을 하면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전부 사들였다. 제목이 그럴싸하면 만화책이나 성인용 도서도 가리지 않았는데, 근로장학생과 사서 그리고 교무처의 담당 선생이 서로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신뢰의 사슬구조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런 책들이 일단 들어오고나면 장학사나 교장선생님 등에게 발각되어 임의처분되지 않도록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구간에 재배치하는 것이 나를 비롯한 상주학생들의 비공식 업무였다. 내가 근현대 철학 부문 서가에 하루종일 쳐박혀서 책장을 헤집어놓아도 그 누구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실제로 그 책들을 읽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책 속의 인물들은.. 2022. 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