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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당신의 이웃 vol 2. 변명 (범죄)

당신의 이웃 vol.2 - (5)

by 구운체리 2022. 1. 25.

5.
나름 조용히 산다고 살았는데, 또래 남자들에 비해 스스로를 과도하게 포장하지 않으며 때론 과격한 생각들을 거침없이 뱉곤 하는 이미지가 신비롭게 팔려져, 뜻밖에도 몇명의 여자들과 더 인연이 닿았다. 그저 사회성이 부족해 대놓고 못할 말을 못 가리는 것 뿐이었지만.
특정 정치인의 자서전을 읽고 있는 모습이 또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 같다. 그때 즈음엔 주하 선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원의 실마리를 찾았을까. 아직도 발버둥의 미학을 믿고 있을까. 얕은 관계의 반복 속에서 문득 나를 여기까지 밀어낸 파도를 만든 그녀의 작은 발버둥을 나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쾌락에 있어 몸과 정신의 만족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각자의 완성형을 엿보게 될 즈음 양쪽 모두를 마무리하고 군대에 가기로 했다. 대단한 뜻은 없었다. 전역하고 돌아오면 귀찮게 구는 학과 사람들과 멀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내 스스로 성적 만족을 느끼는 법과 상대를 만족시키는 법은 우연히 만난 지원이라는 미용사와의 일종의 수업에 가까운 정기적인 섹스를 통해 배웠다. 주하 선배와 나눴던 지적 질문을 완성하는 기쁨은 교양 수업에서 만난 민영이라는 친구로부터 얻었다. 작정하고 연애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간지럽고 아련한 추억들이었다.
군대에 가게 되었노라 고하자 지원은 덤덤하게 그동안 즐거웠다고 답했다. 우리는 낮에 만나 커피 한 잔을 하고 가벼운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나눴는데, 그럴 필요는 없음에도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서로 직감하고 있었다. 우리가 밝은 대낮에 옷을 전부 갖춰입고 나눈 스킨십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그간 그토록 서로의 성감대를 탐색하던 밤들이 무색할만큼 저릿하고 여운이 오래남는 접촉이었다.
민영은 그럼 다음 학기에 특정 수업을 듣지 못하느냐는 멍청한 질문을 하고는 고장난 로봇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다. 내 몫의 햄버거를 다 먹고 한 입만 잘려나간 채 멈춰있는 그녀의 버거를 보고서야 그녀가 먹느라 말이 없던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쉬움인지, 배신감인지, 자책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라 나는 어떤 말을 덧붙여야 적당할 지 알 수 없었다. 일전에 ‘항상 고민만 잔뜩 하다가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놓쳐왔다’던 그녀의 넋두리에 나라는 관계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된 것일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 망설임이 본인을 구한 선택이었다고 안도하고 있겠지. 확실히 우리는 그저 편한 친구보다는 앞서나간 관계였고, 그래서 내가 입대를 한 이후까지 이어질 수가 없었다.
주하 선배의 근황은 입대 직전 당시 막 활발해지던 SNS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다행히 아직 이름이 그대로였고, 성별도 그대로인 듯 했다. 역광을 받은 사진 속에 흰 챙모자와 나풀거리는 비키니를 걸치고 여인의 향기를 뽐내는 그녀는 기억 속의 그것보다 건강하고 건장했다. 인상이 많이 변했어도 나는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무심한 듯이 뚫어져라 쏘아보는 주름진 미간이 그대로였기에.
그녀에게 보낸 메세지의 답장은 제대하기 한달 전에야 도착했다. 그저 유행따라 한 번 만들어두고 잊고 있었는데 다른 어디 가입할 일이 생겨 우연히 접속했다가 내 메세지를 발견했다고. 보다 일찍 답장이 왔다면 미래가 달라졌을까. 그녀의 때늦은 확인이 또 하나의 발버둥으로 쓰나미를 일으킨 것일까.
어쨌든 나는 그렇게 당장의 관계들을 정리하고 육군 포병으로 입대했다.

군대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봤다. 내 맞선임이었는데 소위 말하는 폐급 고문관이었다. 나도 그다지 좋은 병사는 못 되었지만 ‘공일병신의 아들’이라는 수식어 덕분에 똥만 바닥에 안 흘리고 잘 싸도 칭찬받는 이등병 시절을 보냈다. 내 아버지 공 일병은 확실히 어리숙하고 굼떴으며, 사리분별이 어두워 생활관 동료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내가 그에게서 배운 군생활은 아무것도 없지만, 나름 아버지랍시고 뭔가를 가르치려고 노력하기에 나는 듣는 시늉만큼은 열심해 하려고 했다. 그런 내 노력을 그는 무척 감사히 여겼다. 배울 것은 다른 부대원들한테 다 배우고 와서 그저 장단 맞춰주며 시간낭비 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걸까? 아무튼 아랫사람에게도 사소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선량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더 이상 가르치는 척 할 것조차 남지 않게 된 후로부터 그는 자기 깊은 속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중언부언하며 더듬는 언어습관 때문에 즐거운 대화는 아니었지만, 들어보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는 곳이었고, 조금 재미없는 책을 졸면서 읽는 셈 치기로 하니 들어볼만도 했다. 
그에게는 가족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조금 모자란 여자친구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여자친구는 거의 매달 면회를 왔으며, 언제부터는 나도 함께 불러내어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공 일병이 나를 면회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전달했나본데, 귀찮아서 대충 말한 것을 그대로 믿는 순박한 사람, 내가 기억하는 공 일병은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났다. 혼자 총기수입을 하던 중 일어난 일이니 사고가 맞을 것이다. 그의 군 생활에 대한 형식적이면서도 엄격한 내사가 내려왔다.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 의도된 사고일 가능성을 염두에 둔 수사에 가까웠다.
나를 제외하면 간부들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그와 인간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다. 나보다 후임인 녀석들도 그를 대놓고 무시해왔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가혹행위가 있었을 가능성은 높지만, 알려진 바가 없으니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어야 했다. 그의 사고가 그저 사고이기를 모두가 바라니, 곧 모두가 사고임을 아는 것으로 되었다.
꼴에 아버지라고, 그는 자신이 군 생활 중에 겪는 고초만큼은 나에게 직접 일러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전에도 몇번 약실을 제대로 점검하지 않아 사고가 날 뻔한 것을 간부나 선임들이 발견해 크게 혼난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비록 그 일이 실내에서 일어났지만 잠시 주위의 긴장이 느슨해진 틈을 타 발생할 법한 사고라고들 말했다.
공 일병 여자친구의 집 나갔던 아버지가 한참만에 돌아와 괜한 역정을 내며 둘 사이 관계를 갈라놓았던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한동안 공 일병은 면회객이 없었다. 그 즈음 그는 눈에 띄게 우울해했지만, 나만 아는 사실이다. 그런 사소한 신상의 변화를 알린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도 나아질 것도 없다는 것 또한 나는 알았다. 나는 그저 묵묵히 내 아버지를 가장 잘 아는 아들로써 우리 부대가 원만하게 뒷처리를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증언들을 내놓아야 했다. 
그 덕에 공 일병, 아니 이제 공 상병은 실제 그가 행한 군생활에 비해 괜찮은 예우를 받으며 떠날 수 있었다. 그런 나의 배려를 전우들은 무척 높게 샀고, 내가 많은 말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간부들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내 남은 나날들은 평안하고 무탈했다. 하지만 그만큼 홀로 많은 생각들과 질문들을 던지며 싸워내야 했다.
내가 전역을 두 달 앞둔 시점에 공 상병의 여자친구가 한참 피폐해진 몰골로 면회를 왔다. 어째서 공 상병으로부터의 연락이 이토록 뜸해졌냐며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사고 소식도, 전역 시기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왜 아직도 전역하지 못한 채 상병이라 불리는지 설명하는 일을 맡았다. 내 존재가치를 의심하던 먼 후임들도 그때서부터는 입을 다물었다. 공 상병의 일은 내부 안전교육사례임과 동시에 자세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부쳐져있었다. 아마 나는 부대 역사상 가장 적은 업무로 가장 높은 존경을 받은 병사가 되겠지.
나는 공 상병의 여자친구에게 불운한 사고였다고 얘기했다. 
진리란 사치일 뿐이니까.

그 소식을 전하고 한달 뒤 말년 휴가를 나갔다가 주하 선배의 답장을 확인했다. 전역 후에 만날 약속을 잡았다.
주하 선배는 그때 그 시절 백혈병에 걸려있었고, 자신이 곧 죽는 줄로만 알고 그토록 영원에 집착했다고 했다. 주변에 병력을 알리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선생들도 면학 분위기를 핑계삼아 그 뜻에 거들었는데, 어느 또라이가 진실을 숨기는데 도움 준답시고 이상한 소문을 얹었다. 확실히 숨겨지긴 했지.
홀로 병실에서 죽을날만 기다리던 차에 기적처럼 성공적인 골수 이식을 마치고 끝내 완치가 되었지만 학교에는 정이 떨어져 자퇴했다고 했다. 나는 수긍했다.
머리를 바싹 밀고 침대에 누워 임종을 준비하는 동안 주하 선배는 ‘가시고기’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같은 책들을 읽었다. 막연하던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자 의미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다만 혼자 걷는 길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평소에 그토록 하찮게 여기던 신파 범벅의 소설 따위들을 찾게 되었다고. 막상 읽다보니 재밌어서 자꾸 읽으면서 청승을 떨었는데, 어쩐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머쓱할때쯤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단다.
그렇게도 기적을 바랐는데 막상 진짜로 일어나자 문학 속의 주인공이 되지 못함에 어쩐지 서운해졌고, 그런 끔찍한 농담에 가족들마저 도로 드러누우라고 거들만큼 익숙해질때쯤 그녀의 꿈은 연극배우가 되었다. 그토록 몸서리치던 비극적인 엔딩의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의의를 깨달았고, 그것올 몸소 재연해보고 싶어졌다고.
그녀는 더 이상 죽음을 고민하지 않았다. 이제 죽음의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내 쪽이었다.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이어갔지만, 결국 멀어지게 될 것을 서로 알았다. 그녀는 때늦은 삶의 열매를 맛보고자 했고 나는 공 상병이 남기고 간 죽음의 그림자를 감당해야만 했으니까.
공 상병이 정말 사고로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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