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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바다에 빠진 목탁 (일상, 관계)

바다에 빠진 목탁 - (4)

by 구운체리 2021. 11. 13.

4.
 동아리는 의외로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내가 감정이 북받친 상태에서도 논리적으로 대답을 이어가며 책임감 있게 면접을 끝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못해 초인적으로까지 느껴졌다나. 죄책감으로부터의 가산점을 받은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중에 면접관 중 하나가 농담이랍시고, 그 와중에 바다가 나한테 점수를 낮게 줘서 내가 수석을 놓쳤다고 얘기해줬다. 나이도 많은 게 철딱서니 없이 그런 말이나 옮기고 다니고 토론 동아리 임원을 하냐.
 나는 혀를 찼고, 아니나 다를까 그 인간은 딱 그 해, 어린 나이에 조준 잘못해서 애 아빠 되고 인생 꼬였다기에 꼬시다고 신나게 비웃었었다. 내가 나중에 그 꼴이 똑같이 날 줄은 모르고.
 그 와중에 바다 이 괘씸한 새끼. 미운 마음이 들기보다 친해져서 괴롭히고 싶어졌다. 애늙은이 같은 게 불쌍한 표정 지으면 귀여울 것 같았다. 살려주세요 하는 말은 꼭 들어야지.

 바다랑 처음 술을 먹는데 기대 이상으로 말이 잘 통했고 또 의외로 순종적이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제대로 갈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살려주세요’ 나와버리더라. 흡족했다.
 이런 게 남자들이 환장한다는 정복의 욕구 비슷한 걸까. 또 막상 쉽게 들으니까 생각만큼 귀엽지는 않았다. 역시 무슨 열매든 손에 넣는 과정이 중요하지 막상 손에 쥐면 별 것 아니라니까.
 나는 아마 바다가 알지 못했을, 내 상상 속의 목탁이 되어야했던 그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었다. 나를 터뜨렸던 질문지는 그가 혼자 즉석에서 준비한 것이 아닐 것이고, 내 감정의 복합적인 원인 중에 대주주는 내 빌어먹을 어머니가 습관처럼 던진 돌이었으니까.
 바다는 선량했고, 또 부유(富裕)한, 부유(浮遊)하는 정신의 소유자였다. 본인 잘못이 아니면서도 나에게 사과를 했고, 또 내 몸이 아닌 정신에 관심을 보이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는 그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 만큼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공평하다고 생각했고, 말미잘 뒤에 숨는 흰동가리처럼 자꾸 도망가려고 하길래 머리채를 잡아 끄집어내듯이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었다. 분명 그 만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정신상태와 행동거지를 보이는 사람들은 역시 독특한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나처럼, 못된 분위기에서 못되지 않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뿌리가 가정에 단단히 박힌 나무가 아니라 어디든 흘러갈 수 있게 준비된 사람이었다.
 나와 비슷한 외로움을 가진 사람을 만나 공명하는 느낌을 처음 받았던지라, 그때는 잠깐 그게 사랑인 줄 알았었다. 서로를 달래줄 수는 없는 성질의 공명이라 어떤 선을 넘지는 못하겠구나, 머지않아 알게 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새로 사귄 친구가 맘에 들었고, 술 먹는 게 좋았다. 진탕 마시고 필름까지 나간 것 같은데 내 정신이 먼저 풀려서 이 놈이 주정부리는 구경거리를 놓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일어나보니 처음 보는 방에 웬 지게가 있길래 민속촌에 왔나 싶었다. 발밑에 바다가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그릉거리며 잠들어 있는 걸 보고 납득했다. 그리고 안심했다.
 얘 방이면 뭔들 없겠어. 얘 방이면 뭔 일인들 없었겠지.

 잽싸게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가 학교에 왔는데, 누군가 어제 우리를 봤는지 질 낮은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누가 본 거지 잠깐 생각하다가 누구라도 봤겠지, 누군지가 중요하겠어, 세상이 다 좆같다. 무례하고 지독하다 정말. 간절하게 목탁이 필요하다, 목탁.
 불쌍한 바다, 너도 세상이 곁눈질하는 여자로 사는 게 얼마나 엿 같은 지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겠구나. 그만큼 너를 더 아끼게 될 나라는 친구를 얻었으니 이득 보는 거래라고 쳐주라. 내 잘못이 아니지만 괜히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