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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바다에 빠진 목탁 (일상, 관계)

바다에 빠진 목탁 - (1)

by 구운체리 2021. 11. 10.

1.
 나는 쉽게 흥분하는 편이다. 좀처럼 감정을 주체하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무던한 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종종 내 뒤에 서 계시는 부처님이 보인다고 하기도 한다. 목탁을 두들기는 것과 목탁으로 두들기는 것 모두 나의 페르소나이다. 나의 목탁은 내 심장소리에 맞춰 무엇이든지와 끊임없이 부딪히기 위해 태어난 나의 분신이자 나의 정체성, 나의 사랑. 비유법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나만의 목탁을 행운의 부적처럼 침대 맡에 두고 살았다. 실제로 두들긴 적은 많지 않았지만.
 참고로 나는 교회에 다닌다. 종교적 의미를 담아 두들긴 적은 없다.
 내 지랄 맞은 성격에 대해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나의 괴벽은 파도에는 무던하지만 잔물결에 미친 듯이 요동치는, 비유하자면 흔들림의 총량을 보존하는 성질의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한 분노조절-잘해 증후군과 비슷하게 들리겠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내 감정의 파도는 상대방의 크기가 아니라 사건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 분명히 다른 것이다.
 만만한 상대가 큰 잘못을 한 것에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데, 절대 까불면 안 되는 상대라도 사소한 잘못을 하면 그 자리에서 머리통을 붙잡아 찢어놓고 싶은 충동이 든다.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그 대상이 학생주임이었고, 대학교 다닐 적에는 학과주임 교수가 그랬다.
 주임이라는 새끼들이 왜 다 그러지. 학생 주임은 자꾸 식당에서 새치기를 해서 맛있는 반찬을 혼자 다 쳐 먹었다. 학과 주임은 매 학기마다 학과의 장학금 정책에 대해 못된 거짓말을 했다. 특히 내가 목탁을 사게 된 계기는 그 학과 주임의 벗겨진 머리 때문인데, 싹 벗겨진 머리 가운데 주름인지 뭔지 누가 펜으로 그은 마냥 세로로 한 줄이 변색이 되어있어 볼 때마다 목탁이 생각났다. 동기들이 탁이 탁이 탁탁탁 하면서 놀릴 때 나는 진짜 목탁을 하나 사서 학과 술자리에 들고 가 두들기곤 했다.
 그래서 혹시 하고 부처님이 뒤에 와 계셨나.

 긍정적인 감정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첫 해외여행 갈 때 남자친구가 선물해 준 목 베개와 손 편지에 벅차올라 여행 내내 달뜬 몸으로 동동대다 동행한 친구한테 연이 끊길 뻔했는데, 정작 1주년 기념으로 각 잡고 준비한 이벤트에는 영 기분이 시큰둥해서 성의에 보답하는 감정 노동하느라 지쳐 그날 밤에 차버릴 뻔했다. 당시에는 열심히 호응해주느라 몰랐지만, 얘가 오늘 나랑 자려고 했구나 하는 생각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들어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당장에라도 돌아가 길거리에서 바지를 벗겨놓고 조롱한 다음 처절하게 차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 우리가 관계를 하기 전이라 어떻게든 분위기를 끌고 가려는 모습이 보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게 놀기 좋아하는 클럽 죽돌이를 1년 동안 강제로 금욕수행을 시킨 셈이니 마음가짐이 조급해 사소한 결함들을 드러냈을 수 있다.
 감정의 발현이란 복합적인 원인에 의한 하나의 결과이니까.
 사소하고 섬세한 문제들을 차치하고서도, 1주년 기념 대형 이벤트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는다는 기분이 들어버리니 그렇게 마음이 고요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일주년이 별거인가 싶은 생각이지만 굳이 기념할거면 나도 같이 해야지 지 혼자 일주년이야? 서로 챙기지 않기로 처음에 합의 봤으면서 왜 멋대로 나를 관객으로 만들어? 섹스리스 일주년 기념 몽정파티라면 또 모를까. 그딴거를 진짜 했으면 좀 징그럽긴 했겠지만 또 나름 귀여워서 내가 뭐라도 해줬을 지 혹시 알아?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남자친구는 내가 아직 성 경험이 없으며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자기 멋대로 나를 어려운 게임으로 정해두고 깨려는 것 같달까. 흔한 그 나이 대 남자애들의 처녀성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참고로 나는 재수를 했고 남자친구는 삼수를 한 학과 동기라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어쨌든 일을 풀어나가고 싶으면 나랑 대화를 해야지 뭘 알 것 아냐. 직접 대화 소재로 꺼낼 용기는 없으면서 진도 나가는 공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짓으로 시그널을 보내는 게 그렇게 괘씸할 수가 없었다. 키스에 취한 척 허리 쓰다듬다가 손가락으로 살짝살짝 가슴 언저리 건드리면 내가 쾌락에 취해 나도 모르게 허락하는 그런 그림을 원하는 게 투명하게 보여서.
 키스도 연기도 그렇게 잘 하는 것도 아니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