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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바다에 빠진 목탁 (일상, 관계)

바다에 빠진 목탁 - (2)

by 구운체리 2021. 11. 11.

2.
 결과적으로 생각보단 오래 사귀었지만, 진지하게 만날 생각도 없었고 스스로 만든 내 처녀성에 대한 환상에 취한 모습이 즐거워 보여 굳이 깨주고 싶지 않아서 멋대로 하게 뒀다. 2년 정도 사귀다 헤어졌는데 1년 반 쯤 되던 크리스마스 무렵 이 녀석이 드디어 직접 이야기를 꺼내더라.
 자기 나이가 곧 스물넷이고 우리가 만난 지도 곧 연차로 3년차인데 가슴 정도는 보여 달라. 정 안 되면 보면서 혼자라도 하겠다. 연애 초기에 그랬으면 미친 새끼인가 싶어 바로 연 끊었겠지만, 함께 한 시간 동안 이 친구가 변해온 모습들과 나를 만나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알고 있다 보니 그마저도 갸륵하게 보였다. 밤의 제왕이 신부님이 되었다고 떠나간 친구들이 한 트럭이라고.

 근데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내가 포기하라고 한 것 아니고 그가 포기하기를 내가 원한 적도 없다. 나를 만나는 본인의 모습을 위해 스스로 포기한 것들이니 나에게 변화에 대한 책임을 넘기는 것은 마땅치 않다.

 스물 둘까지 클럽에서 꼬시던 여자들은 살 비비고 숨 좀 섞으면 여지를 내어줬나본데, 나는 그러지 않았고 먼저 요구하는 법도 없었으니. 나는 엄밀히 말해 처녀도 아니었고 성 관념이 보수적인 것도 아니었지만, 되도록 조심하고 싶었다. 혼외의 육체관계가 여자에게 지우는 짐이 당위와 별개로 아직은 무거운 편이니까. 밀당을 한 셈이 되었나. 나는 본의 아니게 이 친구의 성교육 선생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갸륵함과 쌓인 정과 습관적인 애정을 담아 친절하게 가르쳤다. 토론 동아리를 오래 해 와서 말빨이 좀 받던 시절이었다.
 너의 자위보조용 실물 교보재가 되는 것은 네 상상보다 훨씬 수치스러운 일이며, 그건 네가 앞으로 언제 누굴 만나더라도 같을 것이다. 알겠으니까 말 끊지 말고 들어라. 함께 나누는 사랑 행위의 한 형태로써 너를 돕는 것은 기꺼운 일이지만, 그 전에 우리가 서로 합의한 섹스 메이트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이 순서이다. 네 멋대로 상상해서 단계 건너뛰지 말고 말을 꺼냈어야 한다. 내가 언제 절대 싫다고 했냐, 네가 대뜸 몸부터 들이박으니까 놀라서 막은 거지. 혓바닥은 말을 하라고 달려있는 고깃덩어리다. 오늘은 집에 가서 진정 좀 하고 발정상태가 가라앉으면 천천히 함께 풀어가보자. 짐승 같은 모습 좋아한다는 거 미디어가 만들어 낸 환상이거나 최소한 나한테는 안 먹힌다, 지금의 너는 좀 짐승 같아.

 다행히 그 친구는 말이 통하는 짐승이었고, 학습하는 짐승이었다. 분명 나를 만나기 전후로 그 친구는 여러모로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니, 나 괜찮은 연인이었던 거겠지? 내가 읊어주는 사랑의 언어가 온전한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많았지만, 연애라는 게 다 그렇지 않아?
 스물로 시작하는 나이가 절반 정도 지날 무렵까지 나는 흘러가듯이 세 번의 연애를 했고, 매번 새롭게 질렸다. 연애도 결혼도 절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바쁘게 살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미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절대로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아니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친구가 참 많았는데, 또 돌이켜 세어보면 친구가 별로 없던 것 같다. 모나지 않고 밝게 행동하려고 노력했고, 친절하고 선량한 동료 시민으로써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목탁도 가슴 속으로만 두들겼어. 가끔 술자리에 들고 다니긴 했지만 그건 웃기려고 한 거니까. 목탁같이 생긴 교수님 외모로 조롱하고 대리폭력 행사한 것 죄송하지만, 솔직히 거짓말 많이 한 거 본인도 인정 하실 거야. 우리에게도 그런 분출구 정도는 있어야지. 대신 사람들이 내 생긴 것 가지고 놀리는 것도 웃어 넘겼잖아.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근데 가끔 세상이 너무 무례하고 질 낮고 지독하게 느껴져 어려울 때가 있다. 못된 사람들이 못된 분위기를 만드는 걸까 못된 분위기가 못된 사람을 만드는 걸까. 둘 다 맞겠지만, 분명한 건 못된 분위기에서도 못되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 가능하다는 것과 그게 못됨의 연쇄를 끊는 유일한 시발점이라는 것. 그게 가능하다고 믿어야 시도라도 가능하다는 것. 시발.
 내가 신을 아주 믿지 않지만 아직까지 교회에 꾸준히 다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