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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달콤한 포도 (일상, 관계)

달콤한 포도 (4)

by 구운체리 2021. 11. 6.

4.
 나는 내가 면접에서 제기한 불공평한 혹평에 대해 주연이가 따지려는 줄 알았지만, 그런 건 사실 몰랐기도 했고 알았다고 한들 신경도 안 쓴단다. 다만, 내가 저를 멀리하다 못해 싫어한다는 느낌마저 받았다고. 주연이는 섬세한 친구였다. 그 원인을 아무리 곱씹어봐도 모르겠어서 곰곰이 되새겨보니 면접 때 일이 생각이 났더라고. 표면적으로는 결국 내가 던진 질문에 말문이 막혀 본인이 눈물이 터졌으니, 내가 난처했을 것이라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아니냐고.
 서로의 첫 인상에 대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던 셈이다. 내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건, 여리디 여리면서도 도화살이 끼어있는 그녀의 첫인상이었지 그때의 난처함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건, 그때 일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아닌 스스로에 대한 평가였다. 자기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이 감정이 북받친 게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었지 않겠는가. 민감한 주제를 건드린 우리의 잘못도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거창하게도 육아 책임의 사회화에 대한 의제를 준비했다. 모든 아이들은 태어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으며, 타인이 지어준 이름으로 세상에 던져진다. 그 타의의 첫 번째 주체인 부모들에게는, 어떤 준비 혹은 책임의식이 필요한가. 몰자격함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물을 수 있을 만큼 우리 사회는 충분한 교육과 기회와 재원을 제공하고 있는가. 그런게 가능하기나 한가?
 주연이는 임의로 한 가정과 현재의 가정 중에 골라보라는 질문에 후자를 선택했고, 그것이 암시하는 바 당신은 평균을 상회하는 행운을 당연한 권리로 누리고 살았던 것이 아니냐는 공격에 그게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며 눈물을 흘렸다.

 당장에 나도 그런 사람이지 못했으면서, 너무도 당연하게 상대방이 건강하고 모범적인 가정에서 자라왔음을 상정해 버린 것이 우리의 실수였다. 물론 공정한 질문이 아닌 것은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 능력을 보려고 한 것이지만, 개인의 역린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음을 이제는 알고 있다. 변명하건데, 우리는 성장하는 중이었다.
 사실, 나의 실수였다. 내가 스스로 갖고 있는 가족 관계에 대한 억하심정을 이런 식으로 풀어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로 미안했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비겁하게도 이런저런 변명을 덧대가면서 풀어낸 어설픈 사과를 주연이가 받아주었고, 나는 미안함과 안도감이 섞여 그동안 어디에도 허물지 못했던 나만의 벽에 구멍을 낼 수 있었다.

 내가 유년시절 내내 살아남아야 했던 정서적인 학대와 물리적 폭력의 역사를, 아주 거칠고 정리되지 않은 언어로 띄엄띄엄, 뱉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도저히 말들이 뭉쳐지지 않아 답답해 죽겠는데 주연이가 거기서 다시 눈물을 보였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슬프다고.
 결국 내 이야기를 제대로 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마음은 전달된 것 같다. 주연이는 훨씬 말을 잘했던 것 같다. 조금 다른 종류의 아픔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비슷한 아픔은 서로 공명하는 성질이 있다고 했던가. 아마 우리가 서로에게 느꼈던 이끌림의 본질은 다른 무엇보다도 뿌리두지 않고 외롭게 부유하는 성정이 서로를 본능적으로 알아본 것에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함께 자유를 갈망하여 투쟁하는 삶의 전우였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주연이를 사랑했다.

 주연이는 나를 끌고 나가 편의점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사더니 내게도 하나 물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첫 담배를 피워보겠다는 계획이 있었다며. 나는 처음이 아닌 척 태연하게 받아물고는 어쩔 줄 몰라 겉숨만 뻑뻑댔고, 처음이라던 주연이는 능숙하게 도넛을 만들었다. 웃음이 터졌다. 마음의 둑이 허물어졌다.
 에이, 들어가면 좋은 얘기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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