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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여행의 목적 (일상, 미스터리)

여행의 목적 - (3)

by 구운체리 2022. 7. 17.

13일 오후 8시
원래의 계획은 자메이칸 음식점을 들렀다 재즈 바에 가서 오후 8시에 시작하는 라이브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7시 반에 정신이 들었으니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했다.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는 이렇게 말했다. '스텝이 꼬이면, 그게 탱고다.' 그래, 일정이 꼬이면 그게 재즈지. 나는 재즈 바를 포기했다.
시애틀은 비교적 안전한 곳이지만, 길거리에 주차하는 것을 꺼릴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노상 갱단이 처벌받지 않고 활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처벌 그게 뭔데 싶은 약에 취한 자들이 불유쾌한 접촉을 감행할 가능성은 어쨌든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함부로 사람을 겨누고 쏘아도 되는 것은 아니지만, 총기 소지가 합법인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A사의 지하에 주차를 하고 1마일 정도를 걸어가기로 했다. 겸사겸사 낮에 못다한 동네 구경을 할 수 있으니, 이게 재즈지. 밥을 다 먹고 나면 재즈 공연은 물건너 갔을테니 새로운 계획이 필요했다. 시애틀에는 맥주를 직접 양조하는 특색있는 브루어리가 은근히 많고, 브루어리에서 직접 운영하거나 혹은 몇몇 브루어리의 괜찮은 라인업들을 들여놓는 펍들이 즐비했다. 그런 정도로도 충분한 재미가 되어줄 것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그 중 몇 개를 검색해보았다. 통닭에 자메이카 식으로 향신료를 입히고 센불을 사용해 익혀낸 메인 요리에 커다란 바나나인 플랜테이션을 구운 사이드가 곁들여져 나왔다. 뜻을 알 수 없는 레게음악이 EDM 사이에 섞여 나왔으며 바 너머에는 레게머리를 한 근육질의 바텐더가 어깨를 드러낸 채 열심히 쉐이커를 흔들고 있었다. 식사가 끝날때쯤 고만고만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곳은 한 군데였다.
여기에서 멀지도 않고 제법 다양한 맥주를 취급하는 곳인데, 일주일에 하루 있는 체스 동호회 모임이 하필 또 오늘이었다. 오는 길에 신호등에 A4용지에 인쇄하여 붙여놓은 조잡한 홍보 전단을 보고 알게 된 곳이었다. 친구도 물론 가본 적이 없는 곳이라, 나란히 새로움에 대한 긴장과 기대를 품고 도전해보기로 했다.
맞이하는 이의 일상에 여행의 요소를 더해주는 것은 찾아오는 이가 전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특별한 선물이다.

13일 오후 10시
테이블 곳곳에 체스판과 말들 그리고 타이머가 놓여있었다. 술집을 찾아온 이는 클럽 가입 여부에 관계없이 누구나 무료로 경기를 즐길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 마구 어질러둔 채 떠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각자 첫번째 맥주를 주문하고, 얼마나 더 마실지는 모른다는 의미에서 '탭을 열어둔 채' 체스를 한 판 뒀다. 우리 둘 다 체스의 기본 규칙은 얼추 알지만, 기보나 전략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폰이 상대방 진영의 끝에 도달하면 어느 말로든 변신할 수 있다는 규칙을 몰랐던 친구가 무소처럼 돌진하는 나의 폰을 방치한 덕에 나는 손쉬운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동호회의 모임은 공식적으로 8시에 시작해 10시에 끝이 났으므로, 이미 떠날 사람들은 많이 떠나고 취할 사람들은 많이 취해있었다. 덕분에 빈자리는 많았지만, 남아있는 플레이어들은 계속 체스를 둘 생각이 있는 상대방을 찾는데 애를 먹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게임을 마치고 쉬는동안 몇몇 사람들이 새로운 경기를 제안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처참하게 지는 것도 무서웠고, 동호회의 소속이 아닌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지켜내고 싶었다.

그런 우리를 알아본 것인지 또 다른 이방인 이반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이름은 이반. 핼쑥한 백인 남성이었고 평균을 조금 웃도는 키였으며 적당히 정돈된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턱수염은 밝은 갈색이고 머리색은 검은색에 가까웠는데, 어느 한쪽을 염색한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 싶어 그러지는 못했다. 서양인의 나이를 눈대중으로 짐작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짐작컨데 이십대 중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첫번째 경기를 끝내고 두번째 맥주를 주문하기 위해 바에 다녀오던 사이 우리의 옆자리의 사내들이 경기를 마치고 떠나있었다. 말 하나를 움직일때마다 연도와 대회 이름을 읊어가며 토론에 가까운 경기를 벌이던 마니아들이었다. 그런 사람들과 게임을 할 자신은 없었다.
그 빈자리에 이반이 앉아있었다. 그는 이렇게 귀엽게 생긴 기물은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맥주를 홀짝이며 폰의 둥근 머리통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우리가 자리로 돌아오자 그는 '내가 실례했나?'하는 얼굴로 자신이 떠나주어야 하는지 물었고, 우리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좋을대로.'
그의 인상이 멀끔하고 무해했기 때문에 이반이 우리 대화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을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시애틀에 머무른지 친구는 일년, 나는 하루, 이반은 한달이 되었다고 했다. 친구는 적을 둔 학교가 있고, 나는 어디에도 매여있지 않은 반면 이반은 임시로 구한 직장에서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오늘도 막 일을 마치고 오는 참이라 정장 차림이라고.
사람의 틈을 자연스럽게 비집고 들어오는 이 친구에게 우리는 제법 흥미를 느꼈다. 이반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반은 쉽고 짧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였기 때문에 얻게 된 언어습관이 소통에는 도움이 되었다. 이반은 스페인, 그 중에서도 카탈루냐에서 왔다. 그는 언제나 첫 문장에서는 자신을 스페인 사람으로 소개하지만, 여행자들을 만날때면 카탈루냐에서 왔다는 설명을 덧붙인다고 했다. 카탈루냐의 분리독립을 속으로 응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자신을 잘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카탈루냐는 국제법상 스페인 정부의 통치 하에 있다. 지금까지 다섯 번의 독립 공화국 건립 선언을 했고, 스페인은 꾸준하게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다섯 개의 공화국이 문을 닫는데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투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반은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랐다.
이반은 어디에서 왔느냐보다 어디로 가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곳이 겪고 있는 소속에 대한 혼란이 그의 영혼에는 자유로움을 불어넣은 것이 분명했다. 이반은 평생 여행자의 삶을 살 운명이었다. 그런 그에게 시애틀은 길고 긴 여정의 중간에 놓인 하나의 정거장이었다.
그는 하늘을 날고 싶어서 항해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푸른 바다 위를 표류할때면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요트 서핑이 취미였다. 넓은 호수와 바다가 맞닿아있는 시애틀은 이반에게 매력적인 도시였고, 보다 길게 머무르고자 직업을 구했다고 했다. 

그즈음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꽤나 궁금해졌다. 어쩌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의 직업이 알고 싶어 안달이 날 때까지 이야기의 뜸을 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스무고개의 형식으로 자신의 직업을 한번 맞춰보라는 도발적인 제안에 우리가 기꺼이 응해줄테니까.
그런가하면 이반은 동시에 체스 경기를 두자고 제안했다. 연달아 세 번의 경기를 이기고 온 참이라나. 내가 이반과 체스를 두는 동안 친구가 스무고개를 하며 이반의 직업을 맞춰보는 것으로 했다. 무엇을 걸고 하는 게임은 아니었다. 스무고개가 끝나기 전에 내가 체스로 자신을 이긴다면 직업을 알려주겠다고도 했다.
반대의 경우에 대해 이야기해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졌더라도 이반은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이 친구가 체스가 너무 고픈데, 한 명과 체스를 두는 동안 놀고 있는 다른 한 명의 무료함을 배려하기 위해 자신을 소재로 한 퀴즈쇼를 급조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주 목적이고, 오히려 체스 경기를 핑계로 끼워넣은 것에 가까웠다.
이반의 체스 실력은 형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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