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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여행의 목적 (일상, 미스터리)

여행의 목적 - (6)

by 구운체리 2022. 7. 24.

13일 오후 4시
평소였다면 서류작업을 대강 마무리하고 퇴근준비를 할 시간이지만, 오늘은 잔업이 있었다. 잔업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는 불과 몇시간 전까지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었던 몸뚱아리를 수습하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시신은 새벽에 공원에서 발견되었고, 이런저런 조사과정을 거쳐 이반이 속한 팀에게 인계되기까지 대략 열시간이 걸렸다.
시신이 잔업이 되기까지 어떤 물리적인 과정과 행정적인 절차를 거쳤는지 이반은 알지 못한다. 다만 전달받은 것들을 지시받은 대로 처리할 뿐이다. 이반은 장례를 돕는 일을 한다. 주로 자연사한 노인들의 정돈된 그것을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예를 갖추어 마무리하는 일을 맡는데, 때론 지역 경찰들로부터 연락이 올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이들의 뒤틀리거나 훼손된 그것을 정리해야 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일은 편하지만 의뢰하는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 장거리 이동을 감수해야 된다는 불편함이 있고, 후자의 경우 의뢰인의 상실감을 고려할 일은 없는 대신 일이 너저분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두가지 경우 모두 극단적으로 불편한 일은 잘 없다고 선배들이 그랬는데, 어제 오늘 이반은 그것들을 연달아 겪게 되었다. 일을 시작한지 이주가 채 되지 않았는데.
어제 퇴근이 늦어 오늘 출근이 늦었으니, 약간의 초과시간이 걸린 잔업이 크게 무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잔업 내용이 구멍나고 조각난 덩어리만 아니라면. 등 뒤에서 쏜 총알이 하나는 복부를 관통하며 창자를 몸 밖으로 끄집어냈고, 하나는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 근처를 헤집어 놓은 채 안에서 박살이 나 여기저기 박혔으며, 다른 하나는 두개골을 뚫고 지나가며 앞뒤로 깔끔한 구멍을 만들어 둔 모양이었다. 그 순서에 따라서 이 사람이 느낀 고통의 정도가 다르겠지만,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는게 경력높은 선배의 설명이었다. 알고 말하는 것인지 주워들은 내용을 대충 떠드는 것인지 알 바는 아니었지만.
이반은 그저 일에 충실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집중했다. 궂은 일은 선배가 주로 맡았으니 곁에서 거들며 배워두는 것만으로 충분히 몫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위가 좋은 편이라 마구 망가진 시체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지만, 선배가 경찰에게 들었다는 다음 정보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시체는 회사 근처의 공원에서 새벽 여섯시 경 발견되었다.

13일 오후 1시
이반은 늦은 출근을 했다. 장거리 운전을 다녀온 탓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사실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차에서 쪽잠을 자느라 피로가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반차를 신청하고 쉬어도 되지만, 별다른 일만 들어오지 않는다면 적당히 사무실에서 시간을 때우다 하루치 근무를 채워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제 특별한 건수 하나를 처리했으니 오늘은 일부러라도 까다로운 건수가 배정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운이 나쁘지 않다면, 일찍 퇴근을 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침부터 재수가 영 찜찜했던 것이 하루의 액땜이 되리라고 바랐던 것이다.

13일 오전 10시
인적이 드문 탓이었다, 라고 관리 담당자는 경찰에게 호소했다. 가스웍스 공원에 둘러진 노란 펜스가 모두 정리되고 사람들이 다시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13일 오전 6시 30분
한적한 공원 근처, 주차요금을 받지 않는 구역에 차를 세워둔 채 잠을 청하던 이반은 때 아닌 인기척에 소름이 돋아 선잠을 깨었다. 무슨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이 잠들어있는 차 안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인데, 집이 아닌 곳에서 잠을 청할때면 종종 느껴지는 위기감각이었다.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잔잔한 호수 위에 떠있는 작은 요트에서 깜박 노루잠에 들었던 어느 날에는 수면 아래 무언가가 배를 뒤집어 엎으려고 기회를 엿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가하면 몽골의 광활한 초원, 사탕 부스러기 같은 은하수 아래 게르에서 겉잠이 들 때는 천막에 불이 붙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작은 것들이 야트막한 무의식의 틈에 뿌리를 내려 불안을 먹고 자라난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생존본능이 울리는 거짓알람이 떠돌이 여행자에게 무척 중요하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보다 더 그 감각을 마주하여 집중하곤 할 때가 있었다.
이번에는 선탠이 된 앞유리 너머로 천천히 지나가는 검은색 밴이 보였다. 배기구에 매달린 작은 방울이 살랑거리며 내는 쇳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 범인이로구나 싶어 이반은 다시 좌석에 깊게 파묻혔다. 곧바로 잠이 다시 올 리는 없어 몸은 잠들었지만 뇌의 일부만 살짝 깨어있는 상태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데 다시 한 번 비슷한 방울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보니 밴이 후진을 하는 중이었다.
별일이네. 방울소리가 멎었고 잠은 완전히 달아났지만 이반은 움직일 수 없었다. 방울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은 들었지만 멀어지는 것은 아직 듣지 못했다. 불길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생각이 깊어지면 그곳에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손가락을 움직여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눈을 뜨고 나면 대개 불안의 실체는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반은 십분여를 홀로 뒤척이다 몸을 일으키려했다. 그때, 멀어지는 방울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도 한동안 방울소리는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반복하며 진자운동을 했다. 검은색 밴은 새벽의 고요한 거리를 앞뒤로 왕복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이반은 한참을 의자에 파묻혀있었다.

13일 오전 6시
검지가 세 번 움직였다. 소리없는 총성이 공터에 울려퍼졌다. 비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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