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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낙서들/시 작(作)

식구

by 구운체리 2021. 12. 30.

고슬고슬하게 쌀알이 잘 익었다. 되지도 질지도 않고 딱 맛나게.
고즈넉한 눈밭을 가르는 강아지마냥 지나가는 주걱을 따라 뜨신 김이 솟는다.
침 고이는 냄새가 코 끝으로 스미어 마음을 채운다. 잘 지어진 밥통에 둘러앉아 밥술을 나눈다.
매일 뜨는 밥 한 수저에 담긴 뜻밖의 완벽함이, 특별한 기운을 주었다.
밥 짓는 이는 자뭇이 뿌듯하다.


매일 몇 번을 지어도 밥 짓는 일은 같지가 않다.
권태마저 지나가 굳어버린 손길은 일용할 양식이 주어짐에 사소한 감사를 잊은 지 오래.
마음에 걸린 짐이 그것말고도 많을테니.
그저 관성으로나마 버텨낼 힘이 되기를, 가끔은 조금의 힘을 더 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래도 문득 한번 힘을 주어, 혹은 아주 우연히, 어쩌면 견딜 수 있는 무게가 그것밖에 남지 않릉 어느 날에,
밥이 잘 지어지면 기분이 좋다.


매일 몇 날을 살아도 하루살이는 쉽지가 않다.
소소한 행복마저 권태로운 어느 날, 인생에 감사할 것이란 남지 않은 것만 같던 오랜 날.
세상 모든 짐은 혼자 다 짊어진 양 느껴지던 그런 날
된 하루를 지나 심술만이 솟던, 뱉어버린 약함과 삼켜버린 후회가 독이 되던 날에
어제와 같은 내일만이 그려지는 오늘에 삶은 옅어지고, 그저 처연한 배고픔만이 선명하던 그 날에,
잘 지은 밥을 만나는 기분이 속도 없이 좋더라니.


오늘은 내가 밥을 짓고 내일은 네가 밥을 짓자. 또 아무나 모레의 밥을 지어보자.
번거로운 감사는 미뤄두고 습관처럼 그저 배를 채우고 보자.
그러다 문득 예상치 못한 기쁨을 만나면, 기쁨을 선물하면,
마주보고 웃자. 그제야 감사하자.
그렇게 하루하루 함께 먹는 식구가 되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