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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래빗 헌팅 (일상)

래빗 헌팅 - (1)

by 구운체리 2023. 3. 30.

1) 우선
'99점이 100점이 되기 위해 일을 더해'
정우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래퍼는 열여덟살 피도 눈물도 없는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서 이런 가사를 뱉었다. 그는 프리스타일 랩 실력으로 언더에서 유명한 실력자였지만, 그가 얼마나 훌륭한 펀치라인을 구사하는지는 그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위 구절이 들어간 노래에는 기가막힌 펀치라인들이 대수롭지 않은 듯 이곳저곳에 박혀있었고, 가사만 놓고 본다면 소위 '찢었다'는 표현부터 시작해서 타블로를 넘어섰다는 극찬까지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정우성을 한참 잊고 살았다. 올티라는 랩네임도, 그의 시건방져보이던 이미지도, 심지어 그가 어느 시절에 나와서 누구와 나란히 활약을 했었는지도 까먹었다. 나에게 정우성은 잘생긴 것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한 명 뿐이었고, 내 이름 '전우선'을 상대에게 소개할 때 걸리적거리는 고유대명사 같은 것에 불과했다. 잘생긴 놈이든 시건방진 놈이든 좋아하지 않았으니 중요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나보다 유명하고, 나보다 잘먹고 잘사는 인간들일테니까, 알아봐야 배만 아프지.

 어제 만난 친구 기열이 놈이 내 삶에 충고를 한답시고 저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두번째 정우성은 한평생 잊고 살았을 것이다. 요새 보니 활동도 뜸하더만.
 '너 지금까지 참 열심히 살아왔다.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포기하지 말아라. 그런 말이 있잖니, 99도의 물이 끓으려면 단 1도만 더 올리면 되는데 그걸 견뎌내지 못해서 포기하면 영영 수증기가 되지 못한다고. 조금만 더 해보자.'
 재수없는 놈 같으니. 분명 같이 어울려 놀았는데 혼자 공부를 잘했었다. 친구들이 다들 어딘가에서 일이년씩 헤매고 있을 때 혼자 조용히 사년제 대학을 사년만에 졸업하고, 군대를 이년만에 다녀오고, 곧장 취업해서 쉬지도 않고 돈을 버는 친구였다. 우리 무리 중 누구보다 돈도 잘 벌었고 모은 돈도 많았다. 똑똑한 놈이니 당연한 일이었고, 모이면 기열씨가 돈을 많이 내줬으니 눈꼴시릴 것도 없이 감사한 분이었지만, 주둥이가 문제였다.
 차라리 제 잘난 맛에 취해 자랑질을 해대면 몇 대 패주고 말 일인데, 저 놈은 우리의 방황을 응원하다 못해 부추기기까지 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장 먼저 대학을 졸업했을때도 '너넨 기술이 있지, 난 할 줄 아는게 없어'라며 앓는 소리를 했다. 이년제 대학을 육년째 다니고있는 기환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학고를 두 번 맞아 학교를 상대로 학사학위를 건 풀카운트 승부를 벌이는 중인 승수가 옆에서 좀 닥치라고 성을 내자 '넌 좋은 경험들 많이 했잖아, 난 니가 부럽다.' 이런 소리를 하며 성질을 긁었다. 우리는 돈 내주시는 분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승수를 말려야했다. 싸우면 승수가 지긴 하겠지만.
 기열이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삶의 권태로움에 대한 푸념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난 겁이 많아서 제일 지루한 선택들만 해왔어. 나도 너네처럼 용감하게 순간순간을 즐길 수 있으면 어땠을까, 항상 궁금하더라. 그때 내가 내 인생을 걸어봤더라면 어땠을까.' 그때 우린 용감한게 아니라 가진 게 없어서 잃을 게 없는 개망나니였던거란다 이 친구야. 
 그런 우리 무리에서 망나니도 이제는 나 혼자 남았다. 다들 어떻게든 길을 찾아서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탔다. 기환이는 갓 돌이 지난 아들까지 생겼다. 승수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상태로 제적당했던 학교에서 제공하는 일종의 패자부활의 밧줄을 잡고 학사학위에 재도전중이었다. 나는 그 사이 다섯 번의 실패를 겪었다. 다니던 학교는 때려치웠고, 아나운서 시험은 5년이 넘게 카메라 테스트의 벽을 넘지 못했고, 야심차게 도전한 스타트업은 남들 다 쉽게 따낸다는 정부 지원금 한번 타지 못하고 실패했다. 프로게이머의 꿈을 달달히 꾸던 때도 있었지만, '진짜'를 만나 실력의 벽을 느끼고 열정이 죽었으며, 최근에는 그나마 만만하게 보였던 스트리머에 도전했지만 반년 가까이 한자릿수 시청자를 거느린 '하꼬'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내가 무슨 일을 더해서 백도를 찍고 끓어오른단 말인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몸 쓰는 일을 배워서 돈을 벌어야하지 않을까 친구야,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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