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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래빗 헌팅 (일상)

래빗 헌팅 - (2)

by 구운체리 2023. 4. 1.

2) 승수
“야, 탄다 탄다. 너네가 먼저 다 정했어. 나는 남는자리, 이거. 1번, 응? 두말하기 없기야, 니들 남자도 아니야 나중에 다른 말하면 내가 고추 자를거야, 동의?”
“아니 근데 지가 지금 그런 말할 처진가 이 개새끼가 진짜…”
“야, 야, 야! 시끄러워, 좀!”
나는 바들바들 떨며 사다리판을 꼭 쥐며 되는대로 말을 뱉었고 열이 받은 우선이가 나를 한대 치려고하니 기열이 녀석이 막아섰다. 우리 중에 그나마 품위라는게 있는 놈이다. 가장 우려했던 기환이가 잠잠해서 다행이다. 어 근데, 주먹을 꼭 쥐고 부들대고 있네. 표정이 안 좋네. 쟤한테는 맞으면 진짜 죽는다.
나는 진심으로 겁에 질린 연기를 했지만 실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이따금씩 운이 따라주는 녀석이 아니라, 필요한 운은 직접 만들어내는 놈이니까.
우리는 지금 사다리 내기를 하고 있다. 당첨되는 녀석은 내 배를 주먹으로 한대 세게 칠 수 있다. 내 목숨을 건, 일종의 도박이지. 결과를 알고있는 나에게는 그저 잠깐의 유흥이지만. 내가 왜 이런 일에 휘말렸는지 이제부터 얘기해줄게. 겁먹은 척 조금만 더 하고.
나는 사다리판을 내려다봤다. 내 번호는 1번, 옆으로는 차례로 우선, 기열, 기환. 당첨번호는 4번 다리 아래로, 나에게서 거리로는 가장 멀었다. 거리가 멀면 당첨 확률이 가장 낮아보이지, 그게 저 친구들이 나에게 1번을 남겨준 이유일 것이다.
모든 것은 내 예상대로. 아 이거 긴장이 되는구만. 식은 땀이 정수리를 타고 내려와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니까, 내가 조금 쓰레기처럼 살았다. 내 탓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내 비중이 제일 크겠지만, 나를 이렇게 낳아준 부모님, 나라는 사람을 만든 사회와 옆에서 지켜보며 방치한 친구 놈들도 다들 조금씩 책임이 있잖아.
자본가 놈들은 또 어떤가. 마약처럼 중독성 강한 것들을 유혹에 취약한 젊은이의 눈앞에 흔들며대면 내가 미쳐, 안 미쳐? 아니 지금은 정신 차렸다니까. 너무 뭐라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내 인생의 친구를 꼽으라면 중학교때부터 어울려지낸 기환이와 우선이, 그리고 기열이가 있다. 기환이는 힘이 세고 기열이는 공부를 잘하고 우선이는 얼굴이라도 봐줄만한데 난 아무것도 없어. 넷 중에 가장 한심한 놈을 꼽으라면 그건 나다.
우리 엄마도 인정했다. 아빠는 기환이 아버지에게 나를 좀 정신이 들 때까지 패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기환이 아버지는 한때 유명한 싸움꾼이었다고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 분 뒷모습만 봐도 딸꾹질이 나오고 소화가 잘 안 되고 그랬다.
그래도 내가 우리 친구들에게 도움이 된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자꾸 변명하는 것 같지만, 사실에 근거해서 이야기해보겠다. 우리가 성인이 되고 각자의 길을 찾아 헤매는 동안 방랑자들에게 쉴 곳을 제공해준 것은 바로 나다.
아 물론 기환이랑 같이 사는 방이었으니 절반만 내 몫이라고 할 수 있지만, 기환이도 같이 잘 어울려 놀았고 또 우리 아버지가 전세 보증금을 전부 지원해줬으니 내 방이라고 해도 되잖아? 관리비는 기환이가 냈지만.
우리의 스무살은 제각각의 모양이었다. 기열이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새내기 생활을 즐기느라 바빴다. 기환이는 아침에는 노동에 저녁에는 운동에 미쳐 살았다. 우선이는 허접한 지방대의 오티 문턱을 밟자마자 때려치고 나와 힙합쟁이 미치광이가 되었다. 나는 재수를 한다는 핑계로 자취방을 얻었는데, 마침 서울에 거점이 필요했던 기환이가 아버지를 설득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니가 저놈 사람 좀 만들어다오’
아버지의 부탁이었다. 그래요 아버지, 저는 이런 ‘사람’이 되었답니다. 다음부터는 ‘어떤’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설명을 하십시오.
그러니까, 하필 그때 또 우리나라가 낳은 사이버 영웅 페이커 선수가 손흥민 선수에 버금가는 국위선양을 하고 있었고, 그때 즈음 게임의 메타가 기가막히게 내 취향에 맞았고, 우리 재능둥이 우선이가 제2의 페이커가 될 싹수가 보이는데. 친구로서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뜻은 없었다. 우선이 그놈 재능이 거기까지인 것은 내 계산 밖의 일이지, 안 그래?
얍삽이나 쓰는 새끼, 그럴 줄 알아봤어야 해.
알고 있다. 다 내 잘못이다. 재수시절 내내 우선이랑 피씨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낭비하다 삼수를 하게 된 것도, 와중에 나만 삼수에 성공한 것도. 우선이 그놈 공부 재능이 그 정도인 것은 내 책임이 아니잖아, 안 그래?
얍삽이나 쓰는 새끼.
그러거나 말거나 소중한 친구들인데, 내가 조금 성실하지 못하게 그들을 대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참 쓰레기가 맞다. 그런 나랑 친구해줘서 고맙다 새끼들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는 화가 좀 났었다. 삼수에 실패한 우선이와 마지막 피씨방을 조지러 간 날이었다. 최신 장비빵빵한.
우리는 항상 말만 마지막이지 사실 그 일이 아니었으면 또 몇달 인생을 더 낭비했을수도 있다. 우선이 그새끼가\게임을 아주 지 생긴 것처럼 얍실하게 해서 날 약올리더라니까. 삼수에 실패한 제 자존감을 그렇게 채우려 들길래 나도 분에 못 이겨 습관처럼 주먹을 몇번 내질렀는데 그곳에 하필 모니터가 있었고, 키보드가 있었다.
나는 돈이 아까워서 도망친게 아니다. 순간의 분노를 못 참고 폭발해버린 내 자신이 무서워서 도망친거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다보니 너무 멀리 와버렸고, 나중에는 우선이 놈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길래 사과하고 돈을 갚을 타이밍을 놓친 것 뿐이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우선아. 근데 옛날 일이고 몇 푼 안 되는데 그 돈 진짜 갚아야되니?

내가 그렇게 도망친 뒤로 우리 넷이 완전체로 모인 것은 몇년만이다. 우선이 저놈도 안 그렇게 생겨서 속이 참 좁아-라고 말했다가 기환이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고 기열이 놈이 계집애처럼 내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겼다.
“너 이새끼 우리한테 한번씩 다 잘못했잖아.”
기열이 말은 맞는 말이다. 얘는 항상 맞는 말만 한다 재수없게. 삼수해서 들어간 대학에서 좀 놀려고 했더니 기를 쓰고 공부를 시키고 학점관리를 하게끔 하려들었다. 우리 부모님도 애진작에 포기한 걸 니가? 나도 지처럼 세상 지루한 샌님으로 새내기 시절을 보내라는거야? 삼수까지 해서 겨우 들어왔는데? 생에 한번 뿐인 새내기 시절을?
그러자 기열이는 넌 그냥 새내기보다 더 새내기같은 생활을 삼년째 하고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항상 맞는 말만 한다 재수없게. 기열이는 정말 극성맞게 나를 챙겼다. 과제 제출기한을 점검하고 공부 진도를 챙기고 가르쳐주고, 아침에 시험이 있는 날이면 모닝콜까지 해줬다.
그렇게 오냐오냐 키워놔서 내가 자립심이 부족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시험 날에 자다가 시험을 못 봤다. 오후 두시에 있는 시험을 자다가 안보러 갈 줄은 몰랐다고, 기열이 놈이 이제 우리 엄마같은 소리를 했었다. 그날 이후로 기열이는 나를 포기했고 나는 두학기 연달아 학고를 맞았다. 우리는 한동안 서먹했었지. 진심으로 고마웠다 기열아. 끝이 좋으면 다 좋은거라고, 너가 그랬었지. 우리, 그러니까 좋은거지?

이제 남은 것은 기환이. 기환이가 벌떡 일어나자 우선이와 기열이 모두 조용해졌다. 아니 좀 말려줘 이것들아, 나 죽어 진짜. 나는 팬티라도 벗을 기세로 바짝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진짜 너한테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분노한 우리 아버지가 니네 둘이 손잡고 군대나 다녀오라고 하셨고, 나와 기환이는 예하고 대답했다. 우리는 사이좋게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입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무서워졌고, 기환이는 육군훈련소 앞에서 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다 ‘이 친구는 입대마저도 지각을 하는구나, 허허’하고 홀로 걸어들어갔다고 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하면 너도 들어가지 말지 그랬냐. 아 농담, 농담.
그렇게 기환이가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난 우리의 자취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현관문 도어락의 비밀번호가 띡 띡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난 직감적으로 생명에 위협을 느껴 속옷차림으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도망쳤다. 그리고 그때 입은 골절상으로 난 4급 판정을 받아 공익근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2층이었는데 착지를 잘못한 탓이다. 허구헌 날 앉아서 게임만 한 몸이니 근육이 받쳐주지도 못했고.
나 이미 벌 받았는데, 국가가 인정한 모자란 놈인데. 잘못 맞으면 죽을텐데, 한번만 살려주시면 안될까요 선생님?

그렇게 내가 제대하는 날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기열이가 중재를 해서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사다리로 하자.”
기환이가 꺼낸 말이었다. 무식해서 가위바위보나 홀짝 밖에 못하는 녀석이 그런 제안을 할 줄이야. 표정을 보니 우선이와 기열이도 이미 동의한 모양이었다. 기열이가 합의안을 주도했으려나, 아니 우선이겠지. 기열이는 또 무슨 복잡한 보드게임이나 포커같은 어려운 게임을 하자고 했을 놈이니까. 재수없는 놈 같으니.
“깔끔하게 배 한 대만 맞고 풀자. 콜? 네가 걸리면 없던 일로.”
이 친구들, 내가 사다리의 강자였던 걸 그새 까먹었던 모양인가. 아니면 그동안 내가 사다리로 너무 많이 이겼으니까 이제는 반드시 질거라고 생각했던거지. 독립시행을 공부하고 오라고 친구들.
아니, 공평한 사다리라면 내가 걸릴 확률이 대충 1/4이니까 1:3으로 저 녀석들이 유리한게 맞지. 하지만 난 사다리의 제왕이다. 당첨 사다리를 고르는 공식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 많이 이기고, 가끔 일부러 져주고 했던거야 친구들아. 이번만 잘 넘기면, 그 비결을 너희들에게도 가르쳐줄게. 
그래, 그거면 공평한 거래가 되겠다.

땀방울이 사다리판에 톡 떨어졌다.
가림판이 치워졌다. 어?
“어? 이건 사기잖아. 야 이새끼들아, 이건 사기잖아! 야 잠깐만!”
사다리에 발판이 하나도 없었다. 화이트보드에 사다리 기둥은 유성매직으로, 발판은 보드마카로 그려놓고 가림막을 눌러서 치우며 전부 지워버린 것이다. 이 사기꾼 새끼들이, 이건 내가 아주 옛날에나 한번 써먹고 안했던건데. 이렇게 대놓고는 안했는데. 니들이 어떻게 이걸. 아니 잠깐만 이건 아니지. 그때 우선이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가 그동안 장난질친거, 우리가 모르고 넘어간 줄 알았지? 준비됐어, 성기?”
“물론이지, 전립.”
어, 그러니까 차례대로 우선, 기열, 그리고… 기환. 머리가 하얘지고 식은 땀이 줄줄 손발이 덜덜 떨렸다. 오줌을 지렸던가. 두 놈이 내 양팔을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주먹이… 딸꾹.... 보이네.”
“글쎄, 달랐을까? 네가 이 순간만큼이라도 정직함을 보였더라면 말이야.”
망나니의 최후통첩과도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우뚝 솟은 기환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아까부터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게 화를 참는게 아니고 기를 모으는 거였구나. 즐거운 인생이었네, 친구들. 딸꾹.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거 한대로 모두 잊는거다.”
‘ㄸ꾸웨에에에엑.’

그렇게 저는 새 삶을 얻었습니다. 착한 어린이들, 어른들, 아니 그 누구라도 따라하지 마세요. 배빵이나 사다리 뿐 아니라, 위에 나온 그 어떤 것이라도.
그러니 절대로, 나처럼은 살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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