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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래빗 헌팅 (일상)

래빗 헌팅 - (4)

by 구운체리 2023. 4. 6.

4) 기환
나는 금방 회복했다. 내 몸은 금방 회복되었다. 친구들은 삶의 제자리로 돌아갔고 아내도 잠시간 시무룩했지만 곧 꿈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돌아왔다. 영준이가 가끔 숭숭이 삼촌을 찾는다는 점을 뺀다면 아무런 티도 안났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냉랭했다.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나간다고 우승이 어디 따놓은 당상이던가. 우승한다고 또 뭐가 크게 달라진단 말인가. 라인장 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나를 노려보거나 피하려는 듯 보였고 후배들마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 정도면 패배한 당사자인 종만이는 얼마나 고달플까 싶어 찾아보니 보이지 않았다. 종만이는 애가 셋이었다. 나와는 비슷한 나이에 아들 키우는 선후배끼리의 정이 있는 막역한 사이였다. 나는 종만이 어디갔느냐고 물었다가 쌍욕을 들어먹었다.
네놈이 폼이란 폼은 다 잡다가 당일에 비겁하게 꼬리말고 내뺀 덕분에 종만이는 준비도 못하고 대회에 나갔다고. 거기서 무리해서 잘해보려다 발목을 다쳐 일도 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항상 뭐가 됐든 잘만 쳐먹던 인간이 배탈이 말이나 되냐고, 핑계를 대려거든 성의라도 보이라고. 넌 그냥 돼지새끼야, 하며 나보다 한 살 어린 그 후배는 침을 뱉고는 떠나갔다. 모두들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열이가 보내준 음식 중에 상하지 않고 남은 것들이 좀 있었다. 사실 기열이가 보내준 것들 중에 상할 법한 음식은 거의 없었다. 끼니를 불규칙적으로 챙겨먹는 내 생활습관을 알기 때문에 신경써서 골라준 것이리라. 팩으로 된 보약이나,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과일이나, 냉동식품 같은 것들.
나는 그것들을 전부 싸들고 종만이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다. 종만이는 전에 없이 성을 냈다. 항상 형님하고 깍듯하던 녀석이 입에 담기조차 무서운 상스러운 말에 귀신들린 듯한 쇳소리를 섞어가며 나를 저주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언짢았다가, 곧이어 무서웠다가, 미안했다가, 이내 슬퍼졌다. 누구의 잘못이고를 떠나서 소중한 동생이 저렇게 망가져있고, 동생이 나를 대하는 마음이 망가져있고, 그런 동생을 보는 내 마음이 망가져있다는 것이 너무나 슬퍼 나는 조용히 병실을 나서려고 했다.
“미안타. 내가 밉다고 내가 준 것들 버리지말고 먹어라. 내가 산 것 아니야, 씨름대회 나가는 선수 먹으라고 귀한 분이 보내주신 것이니 네 것이 맞다.”
“어디가 복기환 이 새끼야!”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문을 닫았다. 아버지라면 이런 때도 다 내탓이오 하며 허허 하고 웃으셨을까. 요새 아버지는 허허 웃지 않으신다. 똥싸느라 대회를 못나갔다 전해드리니 낄낄대며 경박하게 웃으셨다. ‘너도 내 처지를 알겠지?’하시며.
그때 고함소리가 들렸다.
“형! 복형!” 잠깐 망설이는데 뒤이어 아이처럼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복형 내가 미안해, 기환이 형!”

병원을 나서면서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었다. 승수 놈이 나를 최전방에 쳐박아두고 혼자 방에서 고추나 벅벅 긁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도의 분노였다. 지금 마음상태로 사람을 때리면, 그 사람은 필히 죽는다. 그런 마음상태를 가지고 있으면, 내가 죽는다.
그런 생각을 스스로 되뇌이면서도 몸은 홀린 것처럼 회사로 향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신경질적인 경적소리가 들렸고 창문너머로 무어라 된소리를 뱉으려는 사람들을 본 기억이 있는데, 내가 그쪽을 바라볼때면 창문이 도로 올라가던 중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사실 어떻게 회사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출입대장에 정자로 이름 석자를 고이 쓰고 경비원 분들께 구십도 인사를 한 뒤 공장이 아닌 사무실로 향했다. 화가 나면 피가 차가워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때 알았다.
이따금씩 아내의 일로 사무실 동에 들렀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피스 근무자들은 자기가 할 일이 늘어나는 상황이 아니면 대개 해초처럼 나풀거리고 있다고 아내가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꼭 맞았다.
그렇게 나는 해초 숲을 지나 곧장 회장실의 문을 부술듯이 열고 들어가 책상을 쾅하고 내려쳤다. 의자에 파묻혀 뒤돌아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빙글하고 한바퀴 반을 돌았다가, 마저 반바퀴를 돌았다.
아 회장님은 공장장, 즉 사장님 아버지이다.
“아이 씨바 깜짝이야, 문 왜 안 잠겼어 저거. 어... 그 저기 뭐더라. 아 그래, 힘세고 착한 친구. 이름이 뭐였지. 아무튼 뭡니까?”
면접날 보고 몇년만에 처음보는 내 특징을 기억하고 있어서 잠깐 놀랐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얼굴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고 옷매무새가 단정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종만이! 복직시켜 주십쇼!”
“어, 뭐라고? 거, 잠깐 당신 어디 라인 소속이지. 아니 근데 이게 무슨 경우야, 아 입냄새나니까 조금 뒤로 떨어져서 얘기하고, 그래 그렇지.”
그때 공장장님을 보좌하는 인력들이 난리를 인지하고 달려왔고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났음을 직감한 직원들이 그 뒤를 졸졸 쫓아왔다. 그 한복판에 내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며 나중에 아내는 나를 몹시 심하게 혼을 냈다.
“아주 내일 오지 그냥, 나가! 짤리고싶어? 이사람 말고 저기 직원들이나 제자리로 돌려보내! 내가 나갔을때 자리에서 일어나있는 인간들은 전부 짐쌀 줄 알어! 거 당신은 거기 잠깐 있어보고.”
공장장은 의외로 내가 아닌 부하들을 혼을 냈고 소란을 진정시켰다. 나는 그 틈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뭐야, 또 그 여자야? 남자라고? 덩치가 아주 크대? 어머어머, 웬일이야’
“저기, 젊은 친구.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누구 일을 시켜주고 싶으면 대표가 아니라 인사팀을 찾아가야지. 인사팀 어딨는지 알지? 안녕하세요, 인사 말고 사람 뽑는 인사. 알아요? 그래. 자, 오늘 일은 서로 없던걸로 하자고. 자네 아주 남자다운 면이 뽑을때부터 내가 마음에 들었어. 내가 다 기억하잖아 응?”
공장장은 횡설수설했고 나는 마음이 가라앉자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버벅거렸다. 그렇게 나는 어리버리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직원들은 온갖 호기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직접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저사람 미영이네 남편 아니여? 임자있는 것들이 취향이라더니 아주 확실한가 보네그려’

소문이 발보다 빠르다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공장에 돌아가자 라인장이 내 뺨을 후려친것이다. 나는 당장 집에 가라는 명령을 들었다. 처우는 후에 논의해보마.
그리고 집에 가니 아내는 웬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는 자지러질 듯이 울고 이혼을 하자며 난리법석을 떠는 통에 나는 제법 애를 먹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거야 이건. 난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 여보. 공장장님 뭐를 어떻게했다고...? 어쩜 그런 음란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아내는 한동안 영준이가 승수삼촌 이야기를 할때면 뱀눈을 뜨고 입을 막았다.

아내의 충고대로 나는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라인장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승수가 이렇게 했었던가, 생각하며. 근데 여보 진짜 그건 아니야.
“일어나세요. 거 다 큰 어른이 뭐야 이게. 따라와요.”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라인장을 올려다봤다.
“사장님이 데려오래요 기환씨. 갑시다.”

공장장 아들은 몇년 내로 회사를 물려받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다. 회장의 아들인 것도 있지만, 십년 넘게 회사에서 일을 배우며 차근차근 준비해 온 것이다. 그는 경험도 실력도 카리스마도 있어서 차기 회장이 된다해도 누가 불만을 품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하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런 출중한 능력이 항상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빛을 보지 못하니 성격이 비뚤어졌다는 점이랄까.
사장은 나를 보자마자 큰 동작으로 박수를 치더니 손을 내밀었다.
“이야, 우리 기환씨, 역시 내가 눈여겨 본 인재라니까! 알지, 내가 기환씨 힘 쓰는 거 보려고 씨름대회 열었던거. 도망가셔서 아쉬웠지만, 뭐 괜찮아요. 어제 아주 더 큰 구경거리 만들어주셨다며! 제가 사십년 살면서 그렇게 통쾌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아주 감명받았어요. 용식씨, 다음 달에 오피스 복귀하세요. 이런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셨으니 상을 받아야지, 응.”
“감사합니다!” 라인장은 90도로 허리를 접으며 대답했다.
“아 근데, 그래도 우리가 회산데. 기환씨는 어른이고. 절차라는게 있고 책임이라는게 있어야지 않겠어요? 이 정도 단어들은 알아듣죠? 두글자씩 밖에 안되는 쉬운 단어들인데.”
나는 멍하니 그의 입을 쳐다봤다. 아침먹고 양치를 안했는지 앞니에 주황색 무언가가 끼어있었다. 빨간색인가. 쿰쿰한 암내가 났다.
“아냐, 아냐. 그렇게 겁먹은 표정 짓지 말아요 마음 약해지게. 내가 우리 기환씨 얼마나 좋게 보는데. 진짜 내가 아주 기가막힌 기회하나 주려고 해.”
사장은 훤히 빈 종이에 재밌는 글이라도 쓰여있는 양 쳐다보는 척을 했다. 검지를 톡톡.
“그래, 그 종만씨 복직시켜달라고 했던가.”
“꼭 좀 부탁드립니다! 회사생활 잘하려다 다친 친구입니다. 자식이 셋이나 있구요!”
“아 잠깐, 잠깐. 나는 자식이 몇일까 기환씨. 맞춰봐요. 몇이나 될까? 자 힌트.” 그러면서 사장은 손바닥을 쫙 폈다. 사장은 아직 미혼이다. 혼외자식을 말하는건가.
“어... 다섯?” “오백. 무려 오백.”
토끼새끼도 아니고 무슨 자식을 그렇게 많이 깠다는 말인가 생각하는데 사장이 말을 이었다.
“여기 직원들 전부가 내 자식같은 사람들이지. 아니다, 보자 그 사람들이 또 먹여살릴 가족들이 있으니까 한사람당 네명씩 잡으면 이천인가? 이야, 많다 그죠?”
나는 조용히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그래, 그 종만씨 다친게 놀다 다친거지 일하다 다친거는 아니잖아. 그걸 회사가 책임지기 시작하면 이제 출근하다 넘어진 것도 책임지라고 하고 막 그러겠다 그죠. 그러면 회사가 망하고, 회사가 망하면 우리 회사가 먹여살리는 이천명의 자식들이 다 굶어죽어요. 그럼 안 되잖아, 그지? 기환씨 공부는 좀 못했어도 어른이니까 그 정도는 이해하죠? 아 이년제 나왔다그랬나.”
“그리고 기환씨가 도망가서 종만씨가 무리하다 다친거라며. 기환씨 책임도 있네, 그지? 뭐 마음불편한 얘기는 여기까지. 자, 이렇게 할게요. 여기 동전 보여? 내가 동전을 던질거야.”
“앞면이 나오면, 아니지 어디가 앞이냐, 응? 여기 이순신 장군님 나오면, 종만씨 복직. 일감은 뭐 한번 찾아볼게 내가. 대신 기환씨는 어제 한 일 책임지고 회사 그만두는거야.”
“숫자 나오면, 기환씨 승진. 내가 아주 눈여겨볼거야. 대신 종만씨는 못 돌아와. 어제 일은 없던 일로 하는거고. 이해됐어요? 재밌겠지?”
“자 던진다. 거기 용식이 아저씨, 입으로 두구두구 소리라도 좀 내봐요, 긴장감있게. 좀 더 크게, 그렇지. 내가 다 떨린다 응? 아 난 숫자 나왔으면 좋겠다. 기환씨도 그렇지? 자 던질게, 짠!”

나는 우선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있으라는 처분을 받았다. 아무 말없이 오피스를 걸어나왔다. 문을 열어주는 경비아저씨에게 구십도로 인사를 했다. 건물 앞 공터에 있는 대리석 의자에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닿은 냉기가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어느샌가 아내가 종종걸음으로 쫓아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분노에는 단계가 있다. 승수에게 느낀 정도가 중노라면, 종만이 꼴을 보고 회장을 찾아가면서 느낀 정도는 대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극대노의 상태이다. 세상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장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하다.
극대노 상태가 되니 오히려 정신이 맑았다. 허허. 이 두 글자가 생각보다 어렵지않네. 아버지 당신도 이런 마음이셨나요. 그런 적이 있었나요.
아내는 내 눈을 보더니 겁에 질렸다. 반강제로 나를 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왔다. 여전히 승수를 경계함에도 친구들을 전부 우리 집으로 소집할만큼 겁에 질렸다. 아내는 친구들에게 내가 곧장 사장을 찾아내 때려죽이려고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단다. 난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영준이는 승수 삼촌이 온다니 그저 신이 나 있었다.
승수는 몽둥이를 들고 가장 먼저 달려왔다. 내가 사장 경호원들에게 거꾸로 당하는 상상을 했단다. 우리 집에서? 영준이는 쪼르르 달려가 폴짝 뛰어오르면서 머리로 승수의 급소를 들이받았다. 승수는 바닥에서 뒹굴었고 영준이는 꺄르르 웃었다. 깜짝 놀라 괜찮냐며 달려오는 아내에게 승수는 괜찮다고 윙크를 했다.
“저번에 이렇게 놀아주니까 좋아하길래...”
아내는 역시나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영준이를 안아올렸다. 뒤이어 우선이는 촬영장비들을 짊어지고 왔는데 실시간으로 방송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현장이 고요하자 투덜거리며 화면을 껐다. 
곧바로 기열이가 도착했고 나는 오늘 있던 일을 차분하게 얘기해줬다. 아내는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리며 방으로 들어갔고 승수는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우선이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재촉했다. 기열이는 조용히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래서 앞면인데, 뒷면인데. 잘렸냐? 승진했냐?”
“고생했다. 술 한잔 하러가자. 내가 살게.”

승수와 우선이는 중얼거리며 우리 뒤를 따라나왔다.
“아 딴생각하다 놓쳤다. 뒷면이래? 근데 어디가 뒷면이냐. 뒷면이 승진이었나?”
“몰라 이 눈치없는 새끼야, 잘렸나보지 분위기 좀 읽어라.”

허허, 시발 눈치없는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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