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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래빗 헌팅 (일상)

래빗 헌팅 - (3)

by 구운체리 2023. 4. 4.

3) 기환
‘아유 복스럽게도 먹네’
내가 어려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칭찬이자 들어본 거의 유일한 칭찬이다. 나는 복씨가문의 장정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사내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잘 먹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남김없이 깨끗하게 먹어치우고, 가리는 음식은 없었다. 단 하나, 익힌 당근에서 나는 쿰내는 조금 불편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생당근은 싱그럽기만 한데 익히면 냄새가 왜 그런지는 내 친구 중에 가장 똑똑한 기열이도 알지 못했다. 기열이는 익힌 당근도 잘 먹었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힘이 셌다. 한때 그 힘을 나쁜 일에 사용한 과거가 있다는 소문 때문에 많은 이웃들이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인자하다 못해 바보같을 정도였다. 어떤 속상할만한 일이 있어도 허허 하고 웃으셨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강한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을 어려서는 몰랐다. 
시간은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이웃사람들은 아버지의 선량함을 알게 되었고, 힘쓰는 일이 필요하면 복씨 아저씨를 찾곤 했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우리 집은 형편이 넉넉치 못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행복을 찾으려 애썼다. 그래서인지 운도 참 잘 따라주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고 배웠다. 내 인생에는 커다란 복이 세 번 있었다. 훌륭한 부모님을 만난 것이 첫째요 중학교 때 만난 세 명의 친구들이 둘째요 소중한 아내와 토끼같은 자식이 셋째다.
물론 그중에 제일은 세번째 보물들이지만, 나머지도 절대 소중함에서는 모자람이 없다. 부모는 나의 과거를, 가족은 나의 내일에 이유를 만들어줬다면 친구들은 하루하루의 오늘을 사람답게 살도록 도와주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아 내가 오늘 조금 말이 많네. 속상한 일이 있어서, 그래도 간만에 친구들 만나니 속이 든든해서, 아니 진짜로 속이 상해버려서, 정신이 조금 오락가락해서 그런가봐. 미안해 여보 금방 일어날게.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나의 장점은, 힘이 세다는 것 그리고 착하다는 것입니다. 아 또, 성실합니다. 그리고…”
“그쯤 됐어요, 기환씨. 자, 언제부터 일할 수 있을까?”
나는 대학을 일년 정도 다니고 군대를 다녀왔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학 졸업장으로 내가 무얼 한단 말인가. 내가 남들보다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건 곰 같은 체력과 무소같은 근육인데, 이름도 잘 모르는 기계를 여기저기 달고 다니는 일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자그마한 홈을 맞추어 나사를 돌리는 것보다 힘으로 나사를 욱여넣는 일이 나에게는 쉬웠다. 그래서 무턱대고 공장 일에 지원했다. 어려서 해봤던 막노동은 적성에는 맞았지만 다칠까봐 무서웠다. 겁이 많은 나는 현장에서 크게 쓰이지 못했고, 나도 다치는 건 싫었다. 다치면 일을 더이상 못하니까.
아버지가 어느 날 칼에 찔렸다. 옛날의 아버지를 미워하던 사람들의 짓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저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더라도, 사람은 옳지 못한 일을 한 대가를 치르는 법이라고 하시며 허허 웃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더 이상 힘을 쓰지는 못하셨다. 복압이 차면 똥이 줄줄 새는 후유증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식구들이 많아졌고, 나는 당장 돈 벌 곳을 찾았다.
나는 그렇게 친구들 중에 가장 먼저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만난 처자와 눈이 맞았고, 마음이 맞았고, 몸이 맞았다. 금쪽같은 아들을 얻었다. 이름은 영준이라고 지었다. 나는 열심히 일했다. 주변의 모두가 인정했다.
지혜로운 나의 아내는 다른 사람 모두의 인정보다도 두 사람의 인정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바로 내가 일하는 라인의 총 생산량을 책임지는 라인장님과 차기 실세인 공장장님 아드님. 두사람이 내 얼굴이나 알고있을지 모르겠지만, 맡은 일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면 어딘가에 드러나 모두가 알게 된다고 했다.
기열이가 읽어준 ‘중용’의 한 구절에서 그랬단다. 정확한 단어는 생각이 안 나지만 대충 그런 내용이다. 기열이는 나같은 무식쟁이에게도 교양을 가르칠 줄 아는 친구였다.

그리고 역시나, 내가 활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사장님배 라인대항전 씨름대회가 열린 것이다. 아, 사장님은 공장장님 아드님이다. 그것도 우연히 순회를 돌던 사장님이 내 덩치를 보더니 감명을 받아 특별히 종목을 추가하자고 하신거란다.
아차, 또 앞뒤없이 막 늘어놓았군. 그러니까 우리 공장은 매년 여름에 체육대회를 연다. 라인별로 팀을 먹고 축구를 하고 줄다리기를 하고 달리기를 하고, 뭐 그렇게 남들 하는 것만 다 하는 평범한 잔칫날이다.
평소에는 늘 널어놓은 빨래처럼 흐느적거리던 라인장들이 일년에 한번 강낭콩 줄기처럼 빳빳해지는 날이기도 하다. 라인에서 몸을 쓰는 우리들 뿐 아니라 사무실에서 에어컨 쐬며 일하는 멋쟁이들도 함께 어울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도 지금의 아내를 거기에서 만났다.
우승한 라인의 라인장은 사무실 발령에서 우선순위를 얻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만큼 모두가 진심이었고, 때론 살벌하기까지 했다. 그런 잔치의 대미를 내가 장식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아내의 행복한 상상 속에서 우리 라인장은 벌써 오피스로 복귀했고 나는 라인장이 되어있었다. 여사님들이 라인장들을 애교섞어서 부르듯이 ‘복짱님'하고 나를 불렀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내 친구들까지 끌어들였다.
연애하던 시절 나를 옛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게끔 부추긴 것도 아내였다. 마음을 곱게 써야 복이 들어온다나. 그때 조건으로 내가 승수 배를 세게 한대 쥐어박았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는데, 그래서 벌을 받는가보다.
친구놈들은 발벗고 자기 일처럼 나의 씨름대회를 도와주려고 했다. 우선이 놈은 진짜 자기 일을 끌고 오기도 했다. 내가 몸을 불리고 기술 익히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대신 그 과정을 카메라로 찍어서 어디에 올리겠다는 것이다. 운동은 내가 더 잘 하지만 우선이도 꽤 도움이 되는 친구였다.
나와 몇년 살아본 승수는 집안 일을 대신 맡아주었다. 장보고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등등 원래 내 몫이었던 부엌일, 그리고 영준이와 몸으로 놀아주는 일을 맡았다. 이따금씩 아버지 몸조리를 도와주기도 했다. 처음 부탁을 했을때는 움찔했지만 칼맞고 오늘내일 하신다니까는 얼굴색 밝아지더라고. 그 얼굴, 나는 봤다.
기열이는 일이 바빠 도와주지 못하는 대신 운동할 때 좋은 음식 먹으라고 돈을 얼마 보내주었다. 차마 돈을 또 받을 수는 없어 돌려보내니 다음부터는 그냥 승수나 우선이를 시켜서 음식으로 보내주었다. 기열이에게는 갚지 못할 빚이 언제나 많다.
그렇게 씨름대회를 준비하는 한달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모두가 나만 바라보며 응원해주고 또 위해주는 그런 종류의 행복은 어릴 적에도 받아보지 못한 것이라, 나는 혼자 있을때면 눈물이 찔끔씩 났다. 이 행복이 영원하도록 대회 날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방정맞은 생각을 해버렸다.
그래서 대회 날은 오지 못했다.

체육대회는 무사히 열렸다. 씨름대회도 제법 인기가 좋았다고 했다. 우리 라인에서는 내가 못 나가는 경우에 내보낼 후보선수였던 종만이가 대표로 나가 준우승을 했다. 네 팀 나왔지만, 어쨌든 일승은 한 것이다.
나는 배탈이 나서 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전날 먹은 밥이 잘못된 것이다. 영준이가 먹고 남긴 쉰밥과 반찬들이 구석에 쌓여있길래, 습관처럼 먹어치웠다. 대회 전날에 조금이라도 무거워지면 도움이 될까 싶기도 했었다.
원래라면 음식이 상하기 전에 잔반을 먹어치웠겠지만, 치워주는 사람이 있으니 게을러 진 탓이다. 승수는 영준이를 등원시켜주고 돌아와서는 몰아서 버리려고 모아둔 음식물쓰레기 어디갔냐며 찾다가 데굴데굴 구르느라 대회에 가지 못한 나를 발견했고, 응급실에 데려가며 기열이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냈다. 애한테 뭘 먹인거냐고.
먼저 출근해야했던 아내와 촬영 무슨 세팅을 한다고 회사에 나가있던 우선이가 허겁지겁 응급실로 찾아왔다. 퇴근하고 온 기열이가 제일 늦었다.
“뭘, 사람 똥싸느라 아픈 것 보려구들 이렇게 모였어. 그만들 가, 허허.”
“야 성기열! 넌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오기도 제일 늦게 와?”
앙칼진 목소리로 자꾸만 기열이를 질책하기에 나는 겨우 힘을 내 손을 들어 승수 녀석을 내쪽으로 부르려했다. 내 팔이 번쩍 올라가자 승수가 딸꾹, 하며 움츠러들었고 아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팔을 도로 내리고 중얼거렸다.
“괜찮어, 다 내 잘못이야,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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