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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리뷰

(리뷰) 굿 윌 헌팅

by 구운체리 2023. 9. 25.


Not your fault

언젠가 페이스북 내 계정을 소개하는 담벼락(?) 배너에 ‘not your fault’를 적어둔 일이 있다. 그때 그걸 본 어떤 친구가 최근에 굿 윌 헌팅을 봤냐고 물어봤었는데, 그 전에도 이후로도 한동안은 이 영화를 건들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었다. 수학에 자주 노출되는 환경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다보니 영화 혹은 언론 등에서 ‘수학천재’를 연출하는 유치함에 대한 거부감이 좀 있었다. 같은 이유로 최민식 배우 나온 수학자 어쩌구도 아직 못 봤다.
실제로 칠판에 적힌 문제들과 풀이를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봤을 때 별로 fancy한 느낌이 아니었고, 윌이 못 배운 천재라기엔 너무도 교육받은 방식의 풀이 전개 모양인 듯 보였다. 그게 중요한 영화가 아니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만.

아무튼 확실히 이 영화를 보고 적어둔 문구는 아니다. 어디서 건너들은 것도 아니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는지 해주고 싶은 말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다만 분명한 건 20대 초중반의 나는 타인의 상처와 위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많은 상처들을 위로하고 싶어했다. 꽤나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것 같다.
잘 듣고, 판단하지 않고, 상황에 맞는 말들을 해주며 곁에 맴도는 것이 충분한 모범답안이 될 거라고 나이브하게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모든 것들을 나눠질 깜냥이 되지도 못하는 사람일 뿐더러, 적절한 말이라는 것이 거르고 거르다보면 남는 것이 얼마 없다는 점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걸러내다보니 남은 마지막 세 단어가 저거였을 것이다. 그리고 저 문장을 적어둔 즈음부터 나는 남의 상처에 부러 다가가 관심두는 일을 그만두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남의 상처에 관심을 둔 것은 대단히 봉사정신이 강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쭐대고 싶은 시혜적인 도취감에 취해있던 것도 아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위로에 대해서 솔직해질 용기가 없어서 대리만족 겸 방어기제로 세운 내 방식의 벽이었던 것 같다. 과정이야 다사다난했지만 결과적으로 필요한 사람들과 문장들을 곁에 두는 법을 배우는 길로 인도되었으니, 나를 위해 괜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지나친 실례가 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보다 어린 날에 이 영화를 봤더라면, 특히 저 세마디를 걸러내기 직전 즈음에 봤으면 어쩌면 펑펑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도 많이 안정되었지만, 반자동적으로 저 문장을 입에 길들인 사람이 되어버려서 감정이 올라오기보다 션 선생이 not your fault 한번씩 할때마다 속으로 그렇지, 그럼, 하고 맞장구만 나왔달까.
타인의 상처에 관심을 거두었다는 뜻은 아니다. 누군가 조용히 위로를 필요로하며 다가온다면 나는 잘 훈련된 무술인처럼 저 문장을 읊어줄 수 있는 틈을 노릴 것 같다.

정신과 상담수칙같은 것은 잘 모르지만 션 선생처럼 내담자에게 감정적 역전이를 당하는 경우는 썩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극중에서도 얘기하듯이 션은 좋은 상담자보다는 선생에 가깝고, 윌에게는 어른인 친구가 되고자 한 것이니 문제될 것은 없겠다. 다만, 상담주치의와 달리 한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친구’에는 수적 한계가 있다는 것.
달리 말해서 그 중 한자리를 꿰찬 윌이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당첨된 복권을 지능 외에 인복에서도 타고난 것이다. 션 뿐만 아니라 처키, 스카일러, 랭보같은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을 수두룩히 곁에 두었다는 점에서. 인복없이 자구적인 노력만으로 자기 안의 수렁에서 벗어난 사례를 아직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아직 운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아픈 당신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로 접해서 아는 교훈과 실제 삶에서 부대끼며 터득해서 믿게 된 신념의 질은 물론 차원이 다르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다고 고아의 삶을 이해할 수는 없듯이. 하지만 아는 것은 분명 모르는 것보다 도움이 되고, 진짜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는 믿음 속에서 진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영화를 이야기가 아닌 친구로 접한 이에게 영화는 세 마디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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