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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리뷰

(리뷰) 도그빌

by 구운체리 2023. 9. 27.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악을 단죄함에 있어 나약한 사람과 간악한 사람의 그것에 대한 판단은 분명 다르다. 장발장의 ‘생계형 범죄’에는 선처의 여지를 두는 사람들이 제법 될 것이다. 사람의 행동에 대해 환경과 자유의지가 갖는 책임의 비율을 명확한 수치로 계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책임을 묻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저 상황에 있었더라도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라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환경의 책임이 클 것이고, 반대일수록 자유의지의 책임이 큰 것이겠지만, 정량적인 시뮬레이션이 불가능한 실험적 기준이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보다 사회에 득이 되는 대응책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연극적 합의에 사람들은 꽤나 잘 몰입하곤 한다. 바닥에 분필을 그어두고 여기에 벽이 있다고 약속을 하면 이제 그곳에는 벽이 있다. 금을 지나가기 전에는 똑똑 두들기는 몸짓을 취해야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시늉을 해야한다. 덤불 그림이 있는 곳은 돌아서 지나가야하고, 열린 무대 위 네모난 영역 안에서 강간이 일어나고 있어도 문이 열려있지 않으면 금 바깥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연극의 무대는 사고실험을 시행하기 좋은 공간이다.

도그빌은 개들의 마을이다. 붕괴할 정도의 결핍은 아니지만 모든 길의 끝 폐쇄된 집단 속에서 더 나아갈 곳도 이유도 없어 동력을 잃고 차츰 쇠퇴해가는, 개와 같은 수준의 인간들이 모여사는 마을. 그들에게 인간다움과 친절함이 고갈된 것은 아니다. 다만 본능적인 천박함을 억제하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물의 공급과 더러운 물의 배출이 이루어지지 않고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이 돌연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며 외지인을 마음껏 유린하려 든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들을 타고난 악인으로 단정지을 순 없다.
하지만 어쨌든 물은 썩었다. 그 물이 나를 더럽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정화가 불가능한 수준의 연못은 치워버리는게 세상에 이로운 일이므로, 힘을 가진 이로써 청소해 마땅하다.
그레이스는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이후에는 성적으로까지 착취당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레이스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지치고 병든 듯 보였지만 죽을 것 같은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를 묶어둔 개목줄이 느슨해지자 그녀는 미소지으며 마을로 나와 웃으며 인사까지 건넬 정도로, 당한 비극의 크기에 맞지않게 그녀는 꿋꿋하고 당당하다. 그들은 ‘개’이지만 그레이스는 ‘사람’이기 때문에.
개들은 볼장을 다 마치고나자 기어이 사람을 십자가에 팔아넘겨 매달았지만, 사람은 두발로 그 죽음의 형틀에서 걸어나왔다. 그리고 마을을 불로써 청소한 뒤, 떠나버렸다.

감독은 이 영화를 미국 삼부작의 첫번째 작품으로 간주한다고 했다. ‘도그빌’은 미국이고, ‘그레이스’는 예수다. Amazing. 감독의 세계관 속에서 예수는, 그 모든 고통과 죄를 대신 짊어지고 인간의 죄를 사하여준 메시아가 아니다. 그냥 거기에 계시다가 잠깐 마실나와서 구정물에 옷이 젖자 구정물을 다 치워버린, 다른 차원의 존재일 뿐.
비슷한 이야기가 그리스로마신화에도 나온다.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인간세상을 방문했다가 한 노부부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푸대접을 받자, 저 괘씸한 놈들하고 대홍수를 일으켜 청소해버린. 답례랍시고 노부부는 나무로 만들어버렸지. 인간 세상은 신의 권세를 누릴 자격이 없고, 신은 인간과 철학적으로 어울릴 수 없다.
그레이스가 가진 철학이 독선적이라거나 사람들의 그것과 이질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정말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개체들이라서 어울림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결국 수틀리면 복수하듯이 쓸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까. 마냥 선하고 자애로운 ‘신’이란 존재할수도 없고 ‘미국’이라는 천박한 땅에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내내 그레이스의 인내에 답답해하다 마지막 그레이스의 결정에 통쾌함이나 카타르시스를 느낀 사람이라면, 더욱이 ‘신의 부재’에 반박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네가 신이어도 이런 세상에는 불벼락이나 내리꽂을텐데, 신이 존재한들 너의 편이겠느냐.

그러니 신은 죽었고, 여긴 이미 지옥이다. 이곳이 미국이다. (감독 미국 안 가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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