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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

by 구운체리 2021. 12. 2.

1.
 민영은 어디에서나 튀었다. 왼손잡이에 간헐적 채식주의자였고 눈을 찌르는 원색의 긴소매와 팬티보다 살짝 긴 짧은 바지를 사시사철 즐겨 입었다. 자신을 소개할 때 젠더와 성적 지향성 모두 퀘스쳐너리이며 가치관 중립적인 언어 체계를 배우고 완성하기 위해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소수자 아이덴티티를 패션으로 취사선택하는 관종이라 평가했다. 사람들이 보는 그녀는 오른손으로 밥을 잘 먹었고 육즙이 흐르는 고기 요리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곤 했으며, 남자친구와의 연애 경험도 수차례 있었고, 언어는 영어조차 서툴렀다. 민영의 인스타 피드에는 삶의 기쁨과 슬픔이 극단적인 모양으로 전시되어 있었으나, 막상 현실에서 사람들과 그 깊이를 공유하는 일은 없었다.
 미국 서부 유학생들의 한인 커뮤니티 내에서 그녀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지만 사적인 혐오까지는 아니었다. 그녀의 행동은 보편적인 상식의 경계선을 아슬하게 넘나들었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고, 캘리포니아는 그런 이들을 환영했다. 민영 본인도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성격이라 친근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유지했다.
 그저 SNS 중독자의 감성이라 깊게 어울리기는 조심스러운 애, 정도로 말이 돌았다.

 지윤은 한동안 그런 민영과 스스럼없이 붙어 다니는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강남 8학군의 이름난 초중고를 거쳐 서울대를 다니다 훌륭한 GRE 점수로 유학을 온 흠잡을 데 없는 모범생. 사람들은 둘의 친교를 의아해하면서도 질풍노도의 민영과 잔잔한 지윤이 서로에게 안정을 주며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암암리에 서로를 평가하는 커뮤니티 내에서 지나치게 엇나가는 민영을 예의주시하던 이들은 지윤의 억제기 역할을 반겼다. 숫기없는 지윤을 민영이 억지로라도 다양한 파티에 끌고 다녔기 때문에 지윤에게도 분명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 사람들은 생각했다. 사실 대개는 지윤이 등을 떠미는 쪽이었다. 민영은 나가면 잘 놀지만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했다.

 다른 평범한 단짝 관계들과는 달리 민영과 지윤은 서로를 특별하게 점찍어두지 않았다. 누구나 그 둘을 묶음으로 기억하고 있고,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내어 친분을 표현하거나 공개적인 SNS는 물론 사적인 공간에도 그것을 적시하는 법이 없었다. 소위 베스트프렌드 관계의, 대개는 두 이성애자인 여성으로 구성된, 친구들 사이에 유행하던 커플 아이템이나 단둘이 찍은 사진 등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과시하기 좋아하는 민영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의외라고 여길 수도 있다. 사람들은 민영이 지윤의 샌님같은 면을 내심 부끄럽게 여긴다던가, 둘이 어울리는데 다른 누구의 개입이 있었다던가, 심지어 지윤이 신상을 드러내기 불편한 신분이라던가 하는 소문을 떠들고 다녔다. 그저 지윤이 민영에게 조금 다른 의미였을 뿐이고, 다름은 특별함의 증거였지만 가십은 진실보다 갈등을 더 반기는 법이었다.
 지윤 또한 민영을 특별하게 아꼈지만, 특별함을 표현할 말을 꽤 오랫동안 찾지 못했다. 다른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있었는데, 자기만의 가치관을 추구하는 민영답게 남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않거나 침범하지 않는 거리감이 주는 안식이었다.
 지윤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저 온실 속에서 곱게 자라 참하고 여린 화초처럼 여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순수한 품위에 대한 존중과 동시에 그녀가 살아온 삶의 깊이를 후려치고 넘겨짚는 오만한 시선이 동시에 있었기에 마냥 좋은 것도 그렇다고 까다롭게 굴며 바로잡을 것도 되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과는 어차피 막역한 관계로 이어질 생각이 없었고, 그런 바에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이점을 살리는 편이 차라리 나았기에 그대로 두었다.
 민영은 지윤이 순수하다거나 곱게 자란 화초같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귀하게 자란 느낌은 있었지만, 학대당하며 자라는 귀족 어린이를 생각해보면 꼭 평탄한 삶과 연결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지윤이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압박하는 모습을 지켜봐온 민영은 오히려 그녀가 꽤나 모진 환경에서 자라났으리라 짐작했으며, 얼추 들어맞는 추측이었다. 그렇다보니 지윤은 민영과 있을 때, 보다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지만 취미나 관심사가 아주 달라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그들의 관계는 안정적이었다. 시드니가 끼어들기 전까지는.

 시드니는 공주였다. 치렁치렁한 원피스나 원색의 드레스를 즐겨 입었고 커다랗게 찰랑거리는 장신구들을 온몸에 달고 다녔다. 다니는 곳마다 외모를 가다듬고 수십 장의 셀카를 찍었고, 꽃이 물을 찾듯이 사람들의 친절과 칭찬을 유도했다. 한국 이름은 예진이었고 모태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했지만 아주 열심히 나가지는 않았다. 각종 모임에 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는데, 한국인들의 모임에서도 항상 시드니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먼저 소개했다.
 그녀는 활발하고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 한인 모임 중에서는 그녀의 과한 텐션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구성원들이 자주 바뀌는 곳에서 분위기메이커는 귀했다. 어느 모임이건 운영진은 예진을 선점하려 애썼고 그녀는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예진이 미국에 건너온 것은 민영과 지윤이 붙어 다닌 지 한 학기가 지난 가을이었다. 둘은 한인 학생회 행사에 가끔씩 얼굴을 비추었다. 민영은 워낙 인스타그램의 파급력이 높았고 지윤은 각종 유학준비 관련 커뮤니티에서 도움을 많이 베풀어왔기에 둘 다 인지도가 제법 높았다. 그 즈음 건너온 유학생들은 민영을 동경하거나 지윤의 덕을 보았거나 했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서 그 둘을 직접 만나기는 쉽지 않았는데, 민영은 귀찮아서 지윤은 겸연쩍어서 연락을 잘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진은 둘 모두의 열렬한 팬이었다. 지윤이 정리하여 배포한 공부법과 스스로를 분석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읽다보면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영의 인스타에서는 나름의 예술적인 감성과 더불어 화려함을 파급력으로 연결하는 힘이 느껴졌는데, 예진이 무엇보다 동경하는 것이었다. 예진은 민영의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 오래 전 방치된 블로그를 찾았는데, 민영의 중학교 시절 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충격적인 내용들이 많았다.
 민영의 팔에 난 상처를 본 적이 있느냐고 친구들에게 물어봤을 때 예진에게 어떤 악의가 있던 것은 아니다. 한여름에도 손목 근처까지 오는 긴소매를 즐겨 입고 야외활동을 꺼리며 팔을 드러낸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그것이 자상인지 화상인지 수술 자국인지 얘기하지도 않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민영은 수차례 자살기도를 해 부모 속을 썩였던 아이가 되어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블로그가 때맞춰 비공개로 전환된 것을 보니 민영 또한 그 비정상적인 트래픽의 유입과 늘어난 수군거림의 상관관계를 알아차린 듯 했다.
 예진이 미안함을 느끼고 수습할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에 민영은 화끈한 행동으로 대응했다. 팔에 뚜렷하게 새겨진 여섯 줄의 선명한 흉터 위에 다른 손으로 기타를 짚는 듯한 자세를 취해 인스타그램에 올려버린 것이다. 자, 이게 니들이 수군대던 내 속살이다, 하면서.
 지금의 자신과는 상관없는 지나간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때는 충분히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고 어린 날의 치기를 후회하거나 어리석게 여기지 않는다고 적었다. 알지도 못하는 남의 부모 속을 걱정하지 말고 눈앞의 사람이 그런 추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달라는 글을 남겨 일부 사람들에게는 빈축을 샀다.
 자유의 최전방인 미국 서부에 모인 일부의 유교 숭배자들은 투사의 십자가를 짊어진 양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켜내려고 애쓰곤 했다. 부끄러움을 배워 수군거림을 지양하는 보다 현명한 사람들조차 뿌리 깊게 학습되어 편견으로 기울어진 동정의 시선만큼은 완전히 거두지 못했다.
 덕분에 민영은 한인 커뮤니티 내에서 보다 완벽하게 겉돌게 되었지만 본인은 개의치 않았다. 다만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도를 넘는 참견의 댓글들이 늘자 피드에 올라오는 사진과 글이 점점 자극적이고 우울한 색을 띄게 되었다는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은 우울증의 초기 증세라며 걱정했지만 그녀는 다만 잔뜩 성질이 나있을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윤은 평소처럼 민영과 밥을 먹고 장을 보고 각자의 취미를 즐기다 이따금씩 삶을 공유하고 했다. 그래서 지윤에게도 보이지 않는 ‘취급주의’ 딱지가 붙었다. 하지만 둘은 잃은 것이 없었고 오히려 더 넓은 세상으로 등 떠밀린 것을 반갑게 여겼다.
 예진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이 무리에서 멀어진만큼 그녀가 다가가 균형을 맞추어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진은 끈질기게 둘에게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취했고, 딱히 거절의 핑계를 찾지 못한 그들은 마음의 문을 열었다. 예진의 침투적인 친화력 덕분에 처음에는 약간 떨떠름하다가도 그들은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었다.
 세 사람이 붙어 다닌다는 것은 화제가 되었다. 각자의 의미로 상징적인 존재들이었기에 그 모임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선뜻 다가가려는 이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셋을 동시에 그리고 사적으로 만날 기회를 찾기도 어려웠다. 군중 속에 섞여있을 때는 오히려 각자 흩어져 다녔고, 셋이서 붙어다닐 때는 이방인이 끼어들기 마땅치 않았다. 개인적인 활동 영역도 겹치지 않았는데, 예진은 주로 파티에 다녔고 지윤은 체육관에 다녔으며 그럴때면 민영은 도통 보이질 않았다.
 삼총사의 형성이 그들 각자에게도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지윤은 민영에게서 느끼는 편안함을 셋이 있을 때 똑같이 느끼지 못했다. 민영은 예진이 치고 들어오는 거리를 부담스러워했다. 예진은 같이 있을 때 이따금씩 홀로 유리된 듯한 생경한 소외감을 느꼈고 그럴수록 보다 친화력을 공격적으로 발휘하려 했다.
 둘이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예진도 알았다. 겨우 반년이지만 민영과 지윤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도록 동기화된 화학적 신호가 있었는데, 그것을 따라잡을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 문제였다. 예진은 진도에 쫓기는 것처럼 나머지 둘이서 유대를 강화할 틈을 주지 않으려했다. 민영과 지윤은 서로를 그만큼 특별한 언어로 정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예진을 떼어놓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둘만의 시간을 보낼 기회가 오면 내심 반가웠지만, 예진은 남들보다 두 배의 시간을 사는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든 불쑥 찾아와 끼어들었다. 민영과 지윤이 그만큼의 관심으로 호응해주지 않으면 선명하게 토라졌다. 둘은 부채감 때문에라도 예진을 더욱 가까이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셋 모두 가장 좋아하는 친구관계를 조금 잃은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