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4)

by 구운체리 2021. 12. 13.

4.
 계훈과 민영의 사이에 진전이 없음이 뚜렷하게 보이자 사람들은 관심을 거두었다. 계훈은 민영을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았고 이따금씩 마주칠 때면 민영은 깍듯이 예의를 갖춰 계훈을 대했다. 계훈은 그것을 한 단계 진전된 친분의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지윤이 보기에 그건 민영이 노골적으로 가시를 세우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 누가 보기에도 그랬다.
 지윤이 느끼기에 계훈은 겉만 우락부락하지 속은 영락없이 여리디 여린 어린아이 같았다. 나쁜 사람인 것 같지 않아 바보 같은 짓으로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싶었고 민영 같은 친구를 대하는데 필요한 주의사항들을 넌지시 일러주곤 했다. 계훈은 그런 지윤의 충고들을 드물게도 새겨들었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계훈은 지금까지 친구들을 상대함에 있어 동성이라면 카리스마로 압도하여 승리자의 위치에서 대했고, 이성이라면 정복하여 자기의 것으로 취하고자 했다. 정복의 욕구가 들지 않는 이성들은 그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배경과 같았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어. 수많은 여자인 친구들을 늘상 연락처에 거느린 계훈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아직까지 확고했다. 미국 서부의 개방적인 분위기와 문화의 다양성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계훈의 식견을 넓혀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전한 호의로 그가 몰랐던 관점들을 나긋하게 일러주는 지윤의 의미는 남달랐다. 그에게 감히 무언가를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을 제외하고 없었다. 대부분의 지적이란 나의 틀림을 계도하는 목적보다는 서로의 다름에서 생기는 불편함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대를 이끌어 해소하기 위한 공격적인 행위에 가까웠다. 그는 어떤 싸움에도지지 않는 튼튼하고 완벽한 자기중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남의 지적에 맞추어 가치관을 바꾸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윤은 달랐다. 가르치지 않고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를 이끌었다. 자식 교육에 유달리 엄격했던 양쪽 부모님 누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한 방식의 가르침에 문득 지윤이 자신의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기도 했다. 역시 아이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럴 때마다 지윤이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리다는 사실을 잊곤 했다.
 지윤 또한 그가 잠재적으로 욕망을 품을 수 있는 후보에 올라있던 적이 있었지만, 이런 관계라면 평생 친구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민영과의 첫 데이트 이후로 계훈은 민영에 대한 관심이 곧장 식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에 단 댓글 때문에 자신이 대쉬한 사실을 알만한 친구들이 전부 알았는데, 갑자기 노선을 틀자니 자존심도 상했다. 대신 지속적으로 민영의 관심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돌아서지 않았는지 모니터링을 하는 정도의 의미에서 지윤에게 종종 소식을 물었다.
 지윤을 통해 듣는 민영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사람 본인보다 훨씬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계훈은 민영에 대한 관심을 유지한다는 핑계로 지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었다. 테니스 동아리에서도 종종 마주칠 수 있었지만 대회가 끝나고 날이 더워지니 계훈은 동아리 활동을 줄여가던 참이었다.
 그 사이 파티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 몇 명과는 잠자리를 가졌다. 계훈은 한국 친구들 앞에서는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듯 굴었지만, 외국 친구들과의 관계는 밖으로 새어나갈 일이 잘 없었기에 괜찮다고 믿었다. 마음만 맞으면 몸을 섞는 일이 일상인 문화에서 누가 누구와 잤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애초에 가십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밤에는 누구보다 왕성하게 쾌락을 좇고, 낮에는 전날의 자신에 대한 검열이라도 하듯 엄격한 가치관을 표현하고 다니며 고결한 이미지와 실리적 쾌감을 동시에 누리고 있다고, 스스로를 아주 영리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한국 남자들 사이에서 계훈은 실제보다도 훨씬 문란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었다. 일부는 계훈이 술김에 직접 자랑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다보니 계훈과 소매만 스쳐도 그 여자는 십중팔구 계훈과 잤겠거니, 하며 소문이 도는 것이다. 외국 친구들이라고 해도 결국 돌고 도는 파티에서 종종 마주치다보면 풀이 아주 넓지만은 않았고, 가십거리가 아닌 만큼 심각한 비밀도 아니라서 계훈의 어떤 잠자리 버릇들은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관계 직후 그의 거만한 언행들은 아는 사람들 사이의 농담거리가 되어있었다.
 유학생들에 대한 편견들과 달리 보수적인 가치관에 진심인 사람들 또한 적지 않았다. 가장 자극적인 편견은 아무래도 유학생들이 절제 없는 쾌락에 빠져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고 마약류를 접한다는 것이겠지만, 단순한 욕망의 절제를 넘어 보다 본질적으로 자기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당연히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섹스 뿐 아니라 먹는 것, 언어, 연애는 물론 보편적인 관계 형성 등 모든 면에 있어서 그렇다. 철저하게 수직적인 예의범절을 고수한다거나,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어느 정도 당연하게 여긴다거나, 종교나 성적 지향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물론 한국인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런 한국인들에게 있어 계훈은 1호 경계대상이었다. 계훈 스스로가 이미 미국의 무분별한 야만성에 집어삼켜진 탕아일 뿐 아니라 겉으로 점잖은 체는 혼자 다 하고 다니며 폼을 잡는 탓에 자신들까지 싸잡아 욕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그들도 계훈과 어울리는 여자들을 싸잡아 후려치고 있었으면서.
 대중심리가 지적하는 문제점 하나하나보다 대중심리 자체에 결여된 자기검열이 가장 심각한 문제인 것인데,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니 해결이 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같은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다. 계훈과 계훈이들을 전부 쫓아내더라도 그들은 어떻게든 외부 세계로부터 새로운 욕을 먹을 것이고 그때는 또 다른 계훈이를 찾아내려 애쓸 것이다.
 민영과 지윤은 이미 계훈과 수차례 잠자리를 해 '더럽혀진' 여자들이 되어있었다. 남은 희망은 역시 예진이 밖에 없다며, 성당은 잘 나오지도 않는 예진이의 세례명인 아녜스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