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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3)

by 구운체리 2021. 12. 10.

3.
 민영은 평소처럼 입고 나갔다. 예진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튀는 스타일을 고수하기 때문에 민영의 옷장에도 유학생 치고는 다양한 상황에 맞는 옷들이 여러 벌 준비되어 있었다. 예진이 조잘대며 코디를 자처했지만 민영은 고집대로 숄이 늘어진 긴팔 블라우스와 짧은 청반바지를 입고 옅은 눈 화장과 잡티를 가릴 수 있는 최소한의 볼터치만 걸친 채 나갔다. 예진이 자신의 팔과 귀에 달린 쇳덩어리를 몇 개 떼어주려 했지만 민영은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민영이나 지윤은 장신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민영의 서랍에는 상대가 누군지도 가물가물한 우정반지가 하나 있고, 지윤은 목에 거는 로켓 하나와 머리띠로 쓰는 팔찌만을 차고 다녔다. 온갖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잘도 균형을 잡고 돌아다니는 예진의 모습이 민영에게는 기인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예진은 금방 피곤하다고 민영의 침대에 뻗어 잠이 들었다. 
 민영은 잠시 망설이다 그녀를 내버려둔 채 밖으로 나왔다. 룸메이트가 돌아왔을 때 예진이랑 단둘이 남았을 때 어떤 호들갑을 떨까 염려는 되었지만 다른 걱정은 되지 않았다. 민영의 직감에 네이선은 조금도 이성애적 기질이 없었고, 그것과 별개로 네이선은 건강한 가치관을 가진 안전한 사람임을 알았다.
 나오고 나서야 언제 어디서 만나기로 정해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번호 교환도 안 했는데. 못 만나면 그 핑계로 흐지부지, 만나려면 그쪽에서 어떻게든 찾겠지. 하지만 다섯 시 반이 되자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락이 와서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계훈이 신형 테슬라를 몰고 그녀를 데리러왔다. 깜찍한 꼼데가르송 로고에 박힌 눈깔들이 셔츠 여기저기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고 실내 일정에 맞지 않는 선글라스를 굳이 머리 위로 걸쳐놓은 채 은은한 스킨 냄새를 풍겼다.
 계훈이 혹시나 내려서 조수석 문을 열어주려 할까봐 민영은 냅다 차에 타고 문을 닫았다. 누가 볼라. 계훈의 매너는 여느 영화에서처럼 정중하고 부드러웠지만, 민영은 그런 상투적인 수법으로 자신을 떠본다는 생각이 들어 심술이 잔뜩 난 상태였다. 운명적 만남을 기다리는 낭만주의자는 아니지만, 킹카의 몇 번째 걔로 기억되는 것은 싫었다. 민영은 은근하게 강력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했다. 그러려면 연애상대로 너무 저 잘난 줄 아는 이 녀석은 영 아니었다. 차라리 늙은 외국인 교수랑 썸을 타는 게 낫지.

 민영이 나가고 예진은 슬그머니 사그러드는 햇빛의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깼다.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와 불을 켜고는 원래부터 계획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방을 여기저기 뒤적여보았다. 서랍에 들어있는 반지에 적힌 문구를 읽어보고, 두고 간 가방 안에 물건들을 살펴보고, 책꽂이에 꽂힌 책들의 등판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읽어가다 중간 즈음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조그만 노트에서 멈추었다. 역시, 다이어리였다.
 예진은 잠깐 눈알을 굴리고는 다이어리를 꺼내 펼쳤다. 페이지에 적힌 날짜는 무시하고 자기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아무렇게나 적어두었다. 그래서 꽤나 오랜 기간의 일기가 한 권에 담겨있었다. SNS에 드러내는 것과 달리 본인의 속 깊은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민영이었기에, 예진은 제법 몰두해서 날짜의 역순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필력이 제법 괜찮아서 술술 잘 읽혔다.
 그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 현관문을 열쇠로 따고 들어왔다. 예진은 허겁지겁 일기장을 덮어 대충 꽂았다. 심장이 목젖까지 뛰는 듯 했고 손에 땀방울도 맺혔다. 다시 침대에 누워야 하나 고민하며 청각을 곤두세우는데 발걸음은 문 앞을 지나쳐 멀어져갔다. 룸메이트가 돌아왔나보다. 예진은 그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그녀는 다이어리를 다시 꺼내 사진으로 찍어가며 페이지를 처음까지 넘겼다.
 제자리에 두려고 보니 아까 황급하게 다이어리를 꽂느라 원래 있던 자리가 어디였는지 지워져버렸다. 민영은 무던한 성격이니 못 알아채기를 바라며 적당한 곳에 넣어두고 살며시 집을 빠져나왔다. 열쇠가 없으니 문을 잠글 수가 없었지만, 나간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도둑질에 성공한 것처럼 예진은 살금살금 기어서 마당을 빠져나갔고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방에서 단백질 보충제를 마시던 네이선은 창문으로 그 모습을 갸웃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민영의 데이트는 밤 열시가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대화가 잘 통했다기보다 계훈이 기대 그 이상으로 상투적인 행동들을 이어가는데 열심이었던 것이다. 그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주도했고 상대의 대답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예체능을 망라한 모든 과목에서 탑클래스 성적을 거둘 능력이 있었고, 조만간 유수 기업들의 인턴 러브콜을 번갈아가며 하나씩 받을 것이며, 경매에 내놓듯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곳에 스스로의 가치를 팔아 몸값을 불려갈 것이라 했다.
 그렇게 번 돈과 지금까지 모은 자본금을 바탕으로 투자에 크게 성공해 백만장자가 되어 끝내 돈 주고 시민권을 살 것이다. 결혼 얘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민영은 그의 아내가 되어 어마어마한 부와 국적을 보다 쉬운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모든 문장은 '오빠는/가'로 시작해, '선택은 너의 것이지만'으로 끝이 났다.
 애초부터 면전에 퇴짜를 놓을 생각으로 쌀쌀맞게 대했으면 분위기를 끊기가 편했겠지만, 기본 예의를 갖추고 대화를 하다 조금씩 참지 못하고 진심이 섞이다보니 지루한 대화가 길어졌다. 민영이 당돌하게 반박을 해도, 빈정대며 수긍을 해도 계훈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유머를 들은 마냥 먼저 호탕하게 웃고 대답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대화가 이어지는 무드는 아니라서 민영은 그런 대꾸마저도 어느 순간 이후로 멈추었다. 이 시끄러운 남자와 잠시도 주둥이를 쉬지 않는 예진을 붙여놓으면 볼만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민영은 주위 눈치를 봤다. 웃는 것만이라도 좀 조용히 웃으면 안 되나?
 음식은 맛있었다.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고, 운전면허가 없는 민영은 스스로 굳이 찾아오지는 않겠지만, 누군가 데려다준다면 기꺼이 응할만큼 건강하고 다채로우며 균형잡힌 맛이었다. 그래, 그걸로 됐어. 뭐, 거기다 얻어먹었으니까.
 계훈은 학교 근처의 바에 가서 한잔을 더 하자고 했고 민영은 체력을 핑계로 거절했다.
 "오빠 혼자 가세요. 저 너무 졸려서, 우버 불러서 혼자 들어갈게요."
 계훈이 말하길 본인에게 말을 놓는 여자 동생들은 혈연이거나 같이 잤거나 둘 중 하나라고 돌려서 표현하기에, 민영은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도 거리를 두기 위해 존댓말과 '오빠'라는 호칭을 양보했다.
 "오빠가 이거 알려줄게 민영아, 여기서 학교까지는 리프트가 좀 더 싸거든. 왜냐하면,"
 "지금 두 개 찍어보니까 우버가 0.2달러 더 싸네요. 부릅니다?"
 계훈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가 저녁도 샀는데, 시간 조금만 더 내주면 안될까? 선택은 너한테 맡길게."
 "팁까지 대충 80달러 내셨죠? 어떻게, 40달러 벤모해드려요?"
 그제서야 계훈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거, 거절인거지?" 민영은 활짝 미소지었다. 그렇게 긴 시간의 대화 동안 처음으로 맥락이 통하는 대화가 반가워서였다. "오, 맞아요!"
 "그래, 어쩔 수 없지. 돈은 안 보내줘도 돼. 오빠 차로 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
 민영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차에 탔다. 돈도 굳었다! 돌아오는 내내 계훈은 이런저런 말을 걸며 민영에게 점수를 따려했지만 민영은 남은 시간 아주 바보가 되기로 했다. 모든 대답을 '글쎄요'나 '그래요?' 혹은 '전 잘 모르겠어요' 셋 중 하나로 후려쳤다. 앞서의 '거절'이 계훈의 대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오늘 2차에 대한 것이라고 여긴 것인가 한편으론 걱정이 됐다.
 민영을 내려주며 계훈은 심심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민영의 대답은 '글쎄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