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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2)

by 구운체리 2021. 12. 8.

2.
 예진이 미국에서 첫 봄을 맞던 때 계훈이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했다. 계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았고 개중에도 막역한 관계는 없는 듯 했다. 그는 키가 크고 인상이 멀끔했으며 운동을 잘해 지윤이 활동하던 한인 테니스 부에도 돌아오자마자 에이스로 꼽혔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있고 언변이 좋아 원하는 사람을 붙들어두는 힘이 있었다. 이른바 알파메일이었다.
 계훈이 그녀들을 처음 만난 날은 민영과 예진은 지윤의 독촉으로 이른 아침부터 억지로 동아리 행사에 끌려와 테니스 교류전의 선수등록과 물품 지급 등의 행사 운영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던 날이었다. 민영은 언제나처럼 만사가 귀찮고 그저 졸립다는 얼굴에 한편으론 한껏 멋을 낸 것 같은 세상 화려한 착장으로 앉아있었고, 그 옆에서 쉼 없이 조잘대는 친구의 말에 기계적인 호응을 해주고 있었다. 그 시끄러운 아이가 부산스럽게 몸을 흔들 때마다 몸에 매달린 금속덩어리들이 짤랑거리는 탬버린처럼 소음을 거들었다. 운동장에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원피스와 커다란 챙모자를 쓰고서는.
 지윤과 계훈은 각 성별의 에이스라 혼성 부의 A팀으로 짝이 되었다. 가장 먼저 치러진 여성부 개인전에서 지윤은 준우승을 했다. 계훈은 남성부 개인 8강에서 아쉬운 역전패를 당한 뒤 체력을 보충하며 오후의 혼성 경기를 위해 합을 맞추어보고 있었다. 경기를 뛰지 않을 때 지윤은 항상 두 친구와 붙어있었는데, 자연스럽게 계훈도 그들과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물론 계훈은 이미 세 사람에 대해 들어봤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계훈은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부터 커뮤니티 동향을 살펴 셋에 대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한창 젊고 왕성한 시절을 나라에 바치느라 연애를 강제로 오래 쉬었기에, 흥미는 곧장 연애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 기왕이면 첫 연애는 인지도 있는 친구를 사귀어야 자존심이 허락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지윤이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한다기에 돌아와보니 운이 좋게도 곧장 대회 파트너가 되었고, 그 덕에 나머지 친구들과도 금방 면을 트게 되었다. 이쯤되면 운명이 그의 편이 아닐는지. 물론 그런 운이 아니었어도 시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일어날 일은 일어났겠지만 말이다. 그가 인지하기에 세상은 좁고 그는 너무나도 큰 사람이었다.
 계훈은 학창시절부터 똑똑하고 강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공부만 잘한다고 다른 분야의 자기관리를 게을리하며 정신승리하는 초식 남성들과 달리 그는 모든 것을 두루 잘했다. 그가 서울대와 몇몇 지방 거점 의대를 떨어지고 고려대 공대에 합격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큰 돈을 들여 유학준비를 시키셨다. 잠시간의 꿈결 같던 대학생활에 젖어 고려대 정도면 훌륭하지 않은가싶어 넌지시 여쭈었다 날아오는 재떨이에 맞아 이마를 꼬맨 뒤로 그는 나약한 마음을 온전히 극복했다. 아버지는 엄하고 훌륭한 어른이자 지도자였다.
 그는 타고난 머리와 성실성, 그리고 부모님의 아낌없는 지원 하에 받을 수 있었던 치밀한 컨설팅을 통한 체계적인 전략으로 곧바로 지금 대학의 산업공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시며, 미국에서 탈 수 있는 차와 비싼 시계를 선물로 주셨다. 병역을 빠르게 해결하는 조건 하에서였다.
 그가 총장으로부터 최종합격 이메일을 받던 날,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처음으로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셨다. 그는 이미 제법 많은 술을 마셔보았고 여자 경험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당연하게도 그것을 모르고 계셨다. 술과 여자는 어른한테서 배우는 것이라며 화려하고 반짝이는 술집에 데려가 방을 통째로 빌리고는 양주를 주문하고 익숙한 손짓으로 접객 도우미 두 명을 부르셨다. 그리고는 술과 여자에 대한 여러 조언을 해주셨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계훈 옆에 꼿꼿이 앉아 술 한 잔 못 넘긴 채 한 시간을 듣고 있던 누나가 잠깐 피곤한 기색을 비추었다 된통 혼이 나던 장면 밖에 없었지만.
 처음으로, 아버지 같은 남자가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인정한 어른이 된 계훈은, 아버지보다 훌륭한 남자가 되기 위해 부지런하게 여자들을 만났고 공부했다. 이제 여자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깔깔이를 입고 화면 너머의 아이돌 멤버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거꾸로도 읊을 수 있는 경지에 올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역의 아침이 찾아왔다. 사회에서 다시 만나 꼭 그처럼 멋진 남자로 만들어 주겠노라 약속한 후임들의 이름을 잊는데는 정확히 스무 시간이 걸렸다.
 이제 여자라면 통달한 계훈은 외모와 메신저 프로필만 보고도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 경지까지 올랐다. 독특한 삼총사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이후로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해 본 결과 잘만 하면 셋 모두와 번갈아가며 자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물론 사람은 직접 만나봐야 온전히 아는 법이기에 상상을 지나치게 믿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직접 보니 적어도 셋 모두 외모는 그의 기준 이상이었다. 다만 예진은 조금 경박하게 느껴졌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지윤은 막상 운동 합을 맞춰보니 은근히 남자 잡아먹을 인물이었다. 계훈은 본인이 지배할 수 있는 관계를 원했고 남은 후보는 민영이었다. 겉으로 까칠하게 구는 여자가 속은 가장 여린 법이니, 가장 적합한 상대라고 판단했다.

 혼선 경기에서 지윤의 A팀은 라이벌 학교에서 나온 출중한 우승후보를 결승에서 극적으로 꺾고 우승컵을 들었으며, 학교의 통산점수 우승에도 기여했다. 지윤의 활동경력이 길지 않고 계훈도 오랜 공백 뒤 복귀한 첫 대회였기에 우승까지 낙관한 이는 없었다. 그러나 둘의 호흡이 마치 한 몸처럼 좋았고 지윤의 체력을 따라올 만큼의 여학생 상대가 없었다.
 지윤을 결승에서 꺾었던 개인전 우승자는 거기에 모든 힘을 쏟았는지 예선에서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이며 허무하게 탈락했던 것이다. 테니스 교류전은 학교를 넘어 캘리포니아 주 단위의 한인 사회에서도 제법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둘은 그날의 영웅이 되었다.
 지윤은 드물게도 무척 들떠 있었고, 뒷풀이 술자리의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민영과 예진은 자연스럽게 따로 자리를 잡았고 맞은 편 자리에 몇 명의 사람이 다녀가는가 싶더니 예진은 자신의 추종자들 곁으로 끌려가버렸다. 구석에 홀로 남은 민영이 귀가 타이밍을 재던 참에 계훈은 마치 어느 하이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민영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시시하지? 여기."
 "오 지금 그거 플러팅? 멘트 진부한데." 민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속마음 말풍선에 쓰여진 ‘뭐야 이 새끼는?’ 하는 대사가 눈으로 들리는 표정이었다.
 "너 지윤이랑 동갑 아니던가? 나 너보다 오빠인데."
 “?” 민영은 이번에는 문장 부호 하나를 표정으로 뱉었고, 그 대답으로 계훈의 표정에서 약간의 으스댐과 뜻밖의 무례를 너그러이 이해한다는 가증스러운 아량을 읽어냈다. 민영은 만난 지 몇 초 만에 이 사람이 싫어졌다.
 "아! 미국? 오케이, 난 크리스. 민영 킴, 맞지?"
 "아 예 강계훈씨. 킴...은 좀 빼고, 저는 레이첼이라고 합니다, 예."
 "오 레이첼! 레이첼 후? 맥아담스? 와이즈? 아 잠깐만, 맞춰볼게. 혹시 야마가타? 음악 좋아하는구나?"
 "후 이지랄하네, 김씨라니깐. 나 집에 잘 들어가니까 지윤이한테 전달이나 해주쇼." 민영은 잘됐다 싶어, 짐을 챙겨 일어났고 계훈은 일말의 당황이나 망설임 없이 쫓아나왔다.
 "레이첼! 내일 나랑 데이트하자! 저녁으로 내가 괜찮은 지중해 음식점 아는데 어때?"
 "따라오지마! 나 집에 간다고 했다!" 민영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뒤를 돌아 그 오만한 수컷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대답했다. 한번만 더 귀찮게 했다가는 진짜 귀찮은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계훈은 으쓱하며 미소를 짓고는 뒤돌아 술집으로 돌아가며 한 손을 들어 흔드는 시늉을 했다. 민영은 그 뒷통수에 대고 가운뎃손가락을 세웠지만 계훈은 자기 볼일이 끝났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밤 민영의 인스타그램에는 어느 때보다 짙은 분노의 글이 거울에 립스틱이 뭉개져 피처럼 녹아내리는 듯한 의미심장한 이미지와 함께 올라갔다. 다음 날 아침 계훈은 '이따가 봐, 난 너무 기대하는 중이야'라는 뜻의 댓글을 영어로 달았다. 잠깐 사이 거기에는 또 꽤 많은 사람들의 대댓글이 달렸다. 대부분 축하 또는 꾸며낸 질투를 가장해 가십거리를 낚아채기 위한 미끼 투척이었다.
 그 특이한 김민영과 그녀의 절친의 파트너였던 테니스의 왕자 강계훈의 로맨스? 이거 완전 클리셰적인 미국 로코 아니냐? 계훈의 여성편력이 문제가 되기 전이었지만, 그 후였어도 남의 얘기라면 더더욱 흥미로운 주제였을 것이다. 다만 민영은 진심으로 계훈을 싫어했고, 극적인 반전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 달랐다.

 지윤은 술병이 나 뻗었고, 민영은 혹시나 계훈이 캠퍼스에서 자신을 찾을까봐 남은 오후 수업 하나를 제끼고 돌아와 집에 처박혔다. 예진은 자꾸만 자신에게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채는 친구들의 등쌀을 못 견디겠는 나머지 병문안을 핑계로 민영의 집을 찾아갔다.
 "술병은 지윤이가 났는데 왜 여기를 왔어.“
 민영은 반기는 태도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녀를 집안에 들였다. 예진은 민영에게 외국인 룸메이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헐렁한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룸메이트를 만났을 때 예의를 잊고 비명을 질러버렸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나라라지만, 흑인 남성과의 동거라니.
 "헤이 네이선, 시드니. 시드니, 네이선. 내 룸메이트. 아 참 괜찮아. He's gay, 그치?"
 "반가워요, 네이선 부헨드와입니다." 네이선은 민영이 가르쳐둔 것이 분명한 한국어를 민영의 서툰 영어발음보다는 훨씬 능숙한 억양으로 구사하며 예진에게 악수를 건넸고 예진은 당황한 것을 숨기려고 억지로 더 높은 텐션으로 인사를 받았다. 네이선이 볼일이 있다며 곧장 나가버렸고 예진은 원래 찾아온 목적도 잊고 민영을 다그쳤다.
 "아무리 게이라지만, 괜찮은거니? 어머니도 아셔? 다른 친구들은, 지윤이도? 어쩜? 여태 나만 몰랐을 수가 있어!"
 "아오 시끄러. 진정 좀 해, 그렇게 됐어. 원래 살던 여자애가 급하게 나가면서 내놓은 방을 산건데, 들어와보니 쟤가 있는 걸. 쟤 친구들도 만나봤는데 다 착하고 좋아. 여자애들보다 말도 잘 통해."
 "아니 학교는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다 큰 성인남녀를!"
 "이봐, 너네 기숙사에도 룸메이트 혼성으로 신청하는 옵션 있어, 기억 안 남? 거기다 여기는 학교에서 보조금을 주는 거지 학교가 관리하는 데가 아니야. 뭐 방도 각자 따로 있고."
 "그래도 그걸 진짜로 하는 한국애가 어딨어, 그것도 흑인 남자애랑! 말이 통하기는 무슨 영어도 잘 못하면서 너는?"
 "쟤도 영어 잘 못해, 쿠바인가 공화국인가에서 왔대. 그래서 뭐야, 왜 왔어."
 예진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더 이상 대화의 진전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아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 계훈에 대해 물었다. 언제 어떤 매력을 흘렸길래 그 킹카가 홀딱 넘어갔는지, 민영은 어떻게 할 계획인지 등. 은연 중에 그의 타겟이 된 것이 자신이 아닌 민영이라는 것에 자존심도 상해있었다. 속으로는 둘이 아주 잘 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도 그런 속내를 들키기 싫어 더더욱 적극적으로 심드렁한 민영을 부추기려 했다.

 "어제는 그 오빠도 술이 좀 들어갔잖아. 너 연애 안한지 오래됐다며? 일단은 밥만 한번 먹는건데 뭐 어때? 아는 맛집 하나 늘어도 어디야, 그래도 우리보다 선배니까 잘 알지 않을까?"
 민영은 점점 어제 그 사람을 싫어했던 느낌이 희석되고 예진의 말에 은근히 휘둘리는 자신을 보며, 귀찮음에 익숙해진 나머지 설렘 자체에 '금지' 팻말을 달고 거리를 두고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디 적어두지 않은 감정은 기억 속에 단 하루 만에라도 미화되기 마련이라, 민영은 결국 한번 만나보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다. 예진의 말대로 SNS에 쓰기 좋은 경치 좋은 곳들을 계훈이 많이 알고 있으며 운전기사 역할을 하루 동안 해준다면, 낭비에 그치더라도 하루치 감정소모 정도는 투자할 만한 지출이라고 설득당했다. 예진은 민영이 SNS에 환장한다는 사실을 일부러 자극했다.
 그러는 와중에 편한 옷을 입은 민영을 처음 보다시피했고, 팔에 난 상처들과 다른 몸 깊숙한 곳에 새겨진 자해의 흔적들을 발견했는데, 우선은 못 본 척하고 아껴두었다. 오늘의 데이트 무드를 망쳐놓고 싶지 않았다. 민영이 계훈과 시간을 자주 보내면 그 사이에 지윤의 관심을 민영으로부터 빼앗아 오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예진은 본인이 호감을 갖는 그 누구에게나 우선순위가 되고 싶어했는데, 민영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무관심한 유형이라면 지윤은 순위에 따른 대우가 뚜렷한 친구라, 그 첫 번째의 위치가 보다 탐났던 것이다. 그간의 목표들과 달리 지윤의 그것은 얻는 것이 보다 어렵게 느껴져 도전의식을 불러오기도 했다. 예진의 마음 속에서 지윤이 차지하는 비중은 은은하게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