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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5)

by 구운체리 2021. 12. 15.

5.
 예진은 친구들이 자신을 찾지 않으면 금새 토라지며 그것을 온 사방에 알린다. 민영의 경우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지만 역시 주기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어쩌다 친구들이 바빠져 그녀를 하루 이상 잊고 내버려두면 그녀의 SNS는 점점 기괴해져갔다. 별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정서가 그런 사람이라서.
 거기에는 항상 계훈이 '좋아요'를 눌렀는데 그는 그럴때면 진심으로 낄낄대며 그녀의 피드를 탐방했다. 지윤의 해설을 곁들여 이해하고 보니 민영이 반쯤 정신을 놓았을 때의 코드가 은근히 계훈과 맞았던 것이다.
 반면 지윤은 거의 체대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뭐에 미친 사람처럼 테니스를 쳤고 주말에 시간이 나면 장거리 하이킹을 다니기도 했다. 한인 모임과 캘리포니아를 넘어 미 서부 전역을 대상으로 한 테니스 대회를 찾아보고 관련 동아리에 기웃거리고는 했다. 지윤은 세 친구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의 운전면허가 있었고, 공유서비스로 차를 빌려 혼자 멀리 운전을 해서 어디든 다녀오기도 했다. 어쩐 일인지 미국 면허는 반년 째 못 따고 있더라마는.
 가장 똑부러지고 생활력이 강한 친구였기에, 무슨 사정이 있어 갑자기 체대생 방랑자가 되었는가는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내버려두면 알아서 놀다 돌아오곤 했기에 그 사이 예진과 민영은 보다 가까운 관계를 맺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예진은 민영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낱낱이 해부하고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들과 말 못할 비밀사정들을 전부 알아내겠노라 다짐한 상태였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알아봐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특히 보편적이지 않은 과거를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런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할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가끔씩 욕을 먹더라도 남들과 튀는 행동을 하면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알아챈 사람이 파헤쳐주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의무이다. 예진의 생각은 그랬다.
 예진은 자신의 삶이 지나치게 평탄한 것을 내심 불평했다. 부모님은 도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자식들과 감정적인 교류를 많이 하였고, 친오빠는 기대에 부응하듯 무척이나 공부를 잘하고 반듯한 가치관을 가진 청년으로 자랐다.
 가족 내에서 예진에게 요구받는 역할은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며 귀여움을 받는 것뿐이었다.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해봤지만 도저히 부모님의 학창시절이나 오빠만큼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전혀 개의치 않았고, 충분히 기뻐하셨지만 예진은 무언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다. 부모님이나 오빠가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무기가 뭘까. 바로 귀여움이었다.
 어려서부터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한 재롱에 특화된 자신의 귀여움을 이미 사회에서 성공한 지위의 부모님이나 번듯한 오빠가 따라할 수는 없었다. 예진은 스스로를 어디에서나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로 가꾸고 다듬었다. 가족들은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다. 예진은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했다. 그저 한없이 귀엽게만 살기에 그녀도 언젠가 나이를 먹을 것이고, 날마다 새로 태어나고 자라는 아기 고양이들의 그것과 견주어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었다. 나이와 함께 깊어지고, 귀여운 고양이보다 잘 할 수 있는 것, 그건 인간적인 공감이었다.
 예진은 자신이 그렇게 타인의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는 힘의 근원이 사랑 넘치는 가정의 전폭적인 지지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좌절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예진은 가난이 삶의 전반에 미치는 우울한 영향을 체감하지 못했다. 독서와 상상력을 통한 간접 경험으로부터 알 수는 있지만 느낄 수는 없는 그 괴리감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말실수를 몇 번 했고 그 순간 그런 친구들은 그녀에게서 멀어져갔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상대가 일러주었다면, 그녀의 무해한 목적성을 상대가 믿어주었다면, 보다 깊은 사람들이 되었겠지만, 예진도 그 친구들도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던 학창시절의 이야기였다.
 예진은 되도록 자기 배경에 대한 말을 아꼈고, 때론 보다 안 좋은 방향으로 꾸며내기도 했다. 친오빠는 개미 한 마리 때려죽이지 못하는 공격성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지만, 언니에게 맞고 사는 친구의 이야기에 공감해주기 위해 멍 자국을 만들어 보여주곤 했다. 부모님의 폭언에 힘들어하는 친구의 사연에 공감해주기 위해 자신이 겪었던 가장 심한 꾸지람을 최대한 극적으로 부풀려서 키워놓기도 했다.
 이제 예진은 상대가 대충 운을 띄우면 그 주변의 이야기들까지 어느 정도 그려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민영은 부모님 사이가 좋지 않고 둘 중 한명 이상과의 갈등이 제법 심각한 수준일 것이다. 계훈은 자신과 똑같은 성격의 아버지 밑에서 기를 못 펴고 자랐으며 그에 복종하는 어머니를 나중에는 아버지와 함께 무시하며 자랐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지윤은 사랑받고 신뢰받으면서도, 극복할 필요가 있는 어떤 역경을 가족이 함께 이겨낸 경험이 있을 것 같았다. 예진이 가장 선망하는 종류의 성장 서사였고, 예진은 어쩌면 지윤이 되고자 하는지도 몰랐다.
 민영과 계훈은 그런 지윤이 선택한 친구들이었다. 예진은 지윤보다 먼저 지윤이 타인에게 되어주는 '친구'를 구현하고 싶었다. 민영의 일기장을 훔쳐본 데에는 그런 속내가 있었다.

 예진은 자신이 평소에 팔찌들을 치렁치렁 달고 다니던 것을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민영의 집으로 갈까 했지만 아무리 게이라고 해도 흑인 남자아이와 한 집에 있는 것은 어쩐지 꺼림칙했다. 얇게 착 달라붙는 차림으로 돌아다니던 그 아랫도리에 뭔가 남사스럽고 묵직한 것이 씰룩이던 것을 본 것도 같았다. 민영이 데이트했던 그 지중해식 음식점을 구경해보고 싶다는 핑계로 둘은 우버를 타고 먼 시내에 나오게 되었다.
 아는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는 곳에 편한 친구와 단둘이 데이트 간다는 핑계로 예진은 장신구를 싹 벗어던지고 나왔다. 본인도 적잖이 희한한 차림으로 다니면서 예진의 그것들은 내심 거추장스럽다고 여겼던 민영은 속이 다 시원하다고 생각했다. 매번 볼 때마다 저것들이 톡하고 끊어져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그것을 부산스럽게 주워 담는 상상을 했던 것이다.
 헐렁한 소매 아래로 드러난 예진의 맨 팔목을 처음 본 민영은 흠칫하고 놀랐다. 못 볼 것을 실수로 본 것인지, 일부러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 혼란이 왔다. 그 꼴 뵈기 싫던 장신구들이 이것을 가리기 위해서였나. 자신의 팔에 새겨진 것과 비슷한 흉터의 흔적이 제법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예진의 자세는 언제나 너무도 무방비했는데 가리는 것이 몸에 밴 민영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오래된 습관이라기에는 평소의 행동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최근에 생긴 습관이라면 저렇게 무방비할 수가 없을 텐데. 어쨌든 하나는 확실했다. 예진은 그 흉터를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민영은 예진의 팔목을 붙잡았다.
 "너 이거 뭐야. 네가 그런 거야? 언제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