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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7)

by 구운체리 2021. 12. 20.

7.
 과목마다 시험의 구성과 일정은 달랐지만 기말고사는 대개 비슷한 시점에 끝이 났다. 여느 한국의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유수 대학에서도 시험이 끝나가는 기간에는 들뜨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방학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캠퍼스 내부는 조용해지고 기숙사나 학생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역 등은 시끌벅적해지곤 했다. 번화가의 술집에는 참아오던 파티들이 다시 하나 둘씩 열렸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작은 무리의 친구들끼리 여행 계획을 잡기도 하는 반면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서로를 알아가는 네트워킹 행사들도 많이 잡혔다. 
 예진은 셋이서 해변가를 놀러가자고 했지만 민영은 팔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지윤은 물과 친하지 않아서 각자 거절했다. 각자 잠깐씩 한국에 다녀오기로 되어있는데 그 날짜가 교묘하게 엇갈려 셋이 동시에 한국에 머무르는 날은 2-3일 밖에 되지 않았다. 민영의 본가가 부산에 있어 방학에 셋이 만나는 일정을 잡기는 쉽지 않아보였다. 예진을 제외한 둘은 스케줄을 쥐어짜내는 것에 영 시큰둥했고, 예진은 뾰루퉁해져 관두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일정이 가장 심하게 엇갈리는 둘이 민영과 지윤이고, 자신이 그 가운데에 끼어있어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각자와의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에는 용이하겠다는 것이었다.
 예진이 날짜를 그렇게 잡은 데에는, 빈 시간동안 수많은 네트워킹 행사들도 놓치지 않기 위한 목적이 있으니, 사실 민영과 지윤이 그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조금 더 희생했다면 살짝 골치 아플 뻔도 했다. 그런 행사에 같이 가자고 하면 비협조적으로 나올 것 같고, 무엇보다 예진은 여기저기서 조금씩 다른 페르소나를 지어내고 있기 때문에 여러 그룹의 서로 다른 친구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는 일은 선호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그녀의 베프는 공식적으로 민영과 지윤이지만, 둘은 대외적으로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소극적인 캐릭터를 유지하는 편이 좋았다.

 민영이 먼저 한국으로 떠나고 예진은 미국 서부에 파견 나온 어느 유명 교수가 주최한 밋-업 행사에 먼저 도착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계훈과 지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계훈은 공대생이니 그렇다 치지만 지윤은 왜? 이런 자리에도 나오는 친구였나, 예진은 문득 당황했지만 얼른 반가운 얼굴의 가면을 되찾고 둘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하이 크리스? 지윤! 뭐야, 오는 줄 알았으면 같이 움직일걸!"
 "너야말로 전공 분야도 아닌데 어쩐 일이? 난 여기 주최하시는 분이 테니스도 좋아하셔서 운동하다 친해졌거든. 공짜 밥 먹고 가라고 하셔서 인사차 들렀어."
 "웬일이니 정말, 나도 운동을 하나 배워야 되려나보다. 엄청 유명하신 분인데!"
 "선배 말 들어보니 그렇다더라. 난 내 전공이 아니라 그런가 그냥 편한 동네 아저씨 같더라고."
 "대박이다 너, 이런데도 잘 다니고. 나도 좀 데리고 다녀 다음부턴!"
 "나야 좋지, 너 따라다니면 나는 말도 안 해도 되고."
 "난 그럼 우리 과 선배 좀 찾으러 가볼게, 둘이 다녀라. 또 봐, 시드니."
 계훈은 불쑥 끼어들어 작별 인사를 하고는 인파 속으로 총총대며 사라졌다. 어딘가 평소와 같은 듯 하면서도 목소리에 힘이 없다고 느끼는 찰나 지윤이 같은 것을 눈치 챈 듯 물어왔다.
 "저 사람 어딘가 좀 불안해보이지 않아?"
 "크리스? 난 쟤랑 안 친하잖아, 모르지. 같은 과도 아닌데 선배라고 부르네?"
 "그냥 오빠라고 부르기 좀 그래서. 덩치만 컸지 애기야 애기."
 "웬일? 너 혹시 관심 있는 거야? 이제 민영이한테는 관심 없대?"
 "내 우승 파트너잖아. 하여튼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구석이 있어. 민영이 얘기는 맨날 하는데 뭐 그냥 습관적으로 묻는 것 같아. 민영이 지금 한국 갔다는 것도 저번에 말해줬는데 까먹었더라."
 "그럼 내가 한 번 만나볼까..."
 "아서라. 둘 다 상처만 받을 걸."
 "나 상처받는 거 좋아해, 연애할 때는 아주 나쁜 년이거든. 몰랐지?"
 지윤은 조용히 웃다 서빙하는 아이가 눈앞에 가져온 트레이에 손을 뻗어 핑거푸드를 집었다. 예진은 그 옆에 놓여있는 샴페인 잔을 들이켰다. 둘은 행사장을 돌아다니며 몇몇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받아두었다. 아직 학부 저년차인데다 분야도 다른 그들이 얻어갈 생산적인 것은 없었지만, 다음 주에 열리는 다른 행사에 초대받은 것은 괜찮은 수확이었다.
 예진은 행사를 주최한 교수와 면을 트고 싶어했지만, 그는 너무도 인기가 많고 바빠 모든 사람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여력이 없었다. 지윤을 통해 겨우 얼굴을 비추고 인사만 나누며 이름을 알린 것이 전부인데, 교수는 그마저도 '씬디'라고 잘못 알아들은 듯 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 자기의 직업과 전공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모임에는 낄 자리가 없을 것 같자 둘은 밥만 먹고 먼저 자리를 뜨려하는데, 밖에서 계훈이 혼자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선배, 나와있었네? 우리 먼저 가려고." 지윤이 작별인사를 하며 우버를 부르려고 핸드폰을 꺼내자 계훈이 손을 저으며 차키를 흔들어보였다. "나도 갈거야, 학교 쪽으로 가지? 이것만 피우고 태워다줄게, 1분만."
 계훈의 표정은 어딘가 씁쓸함과 개운함 사이에 있었다. 해야만 하는 말을 어렵게 한 사람과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한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보였다. 자신감과 좌절감이 왔다 갔다 해보였는데, 그냥 담배가 맛이 없어서일 수도 있었다. 셋의 돌아오는 드라이브는 의외로 무척 조용했다. 계훈은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있었고 지윤은 그의 침묵을 존중하고 있었다.
 예진은 둘 사이의 침묵이 뜻밖에 무거워 깨고 들어갈 공간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하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둘을 지윤의 기숙사 앞에 내려줄 때서야 계훈은 입을 열었는데, 지윤은 그저 미소만 짓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진의 집은 기숙사에서 멀고 일반 주택가인 민영의 집에 가까웠지만, 괜히 어색해서 더 태워달라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영문인지 묻는 예진의 눈짓에도 마찬가지로 지윤은 눈웃음만 지은 채 돌아갔다. 예진은 잠시 가만히 서서 그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지윤아. 사람들한테서 이해받지 못한다는 게 참 외롭다. 안 그렇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