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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8)

by 구운체리 2021. 12. 22.

8.
 민영은 한국에서 홀로 지내는 동안 앞뒤가 맞지 않는 예진의 말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었다. 귀찮게 들러붙던 계훈을 지윤이 처리해주느라 둘이 붙어 다니는 동안 예진이 자신에게 들러붙어 파고 들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흐름들이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예진은 자기가 자해를 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민영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민영은 그 누구에게도 굳이 자신의 과거를 자세히 공개한 적이 없었다. 부끄럽고 속된 일이기도 했고 그것을 꺼내어 들추고 다시 나열하는 작업들이 결코 편안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예진의 어떤 과거들은 그녀의 것과 똑 닮아있었다. 부모님의 맞바람이라던가 집안에서 마구 날아다니던 물건들, 그로 인해 날카롭게 조각난 가구의 파편들과 마음의 편린,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핏자국이 흥건한 마룻바닥을 울면서 닦고 있던 언니. 다섯 살 위의 언니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짐을 챙겨 집을 나섰고 동생을 비롯한 모든 가족들과 연락을 끊었다.
 열여덟, 민영은 밥을 먹다 밥상에 튀어나와있던 날카로운 파편에 팔을 베였다. 눈물이 맺힌 그녀의 팔을 보던 엄마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며 근처에 보이던 걸레를 던져주었다. 걸레에는 김칫국물이 묻어있었는데, 흐르는 피를 닦으면 어차피 비슷한 빨강이라 티가 나지 않을 것도 같았다. 민영은 그때의 언니를 떠올리며 흐르던 눈물을 되삼켰다.
 그녀가 고등학교에서 자해 소동을 몇 차례 벌인 뒤로 부모는 본격적인 별거에 들어갔고 그녀는 외할머니 집에 맡겨졌는데, 외할머니는 그녀를 끌어안고 한참을 미안하다며 우셨다. 민영은 할머니 품에 안겨 그때 삼켰던 눈물을 전부 털어냈고, 그 후로 눈이 뻑뻑해서 저도 모르게 흐르는 경우를 제외하면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부모는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로 각자의 연애 상대와 삶을 즐기는 것에 합의했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때때로 소주를 드시고 제 딸과 사위 모두를 향해 세상 사나운 욕을 퍼부었는데, 민영이 곱게 자라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을 때는 당장 내일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울다가 웃다가 반복하며 여기저기 자랑을 하셨다. 정작 그녀가 출국할 때에는 덤덤한 표정으로 당부의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아마도 집에 돌아가신 뒤 펑펑 우셨을 것이다.
 한국을 열흘 동안 다녀올 계획을 세웠는데, 그 사이 못 만났던 한국의 많지 않은 친구들이나 여행지들을 돌아볼까도 싶었지만, 잠깐 사이 눈에 띄게 노쇠해진 할머니를 보자 그런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민영이 들어오는 날을 시차를 잘못 계산하고 전날부터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밥상에는 눅눅해진 전과 까맣게 갈변한 사과들을 비롯해 이쁘게 차려져 있었다.
 상 위에 있는 것만 잘 아껴먹어도 열흘을 나겠다 싶었지만 그만큼의 찬거리를 또 한가득 이고 지고 들어오는 할머니를 보며 민영은 그만 아득해졌다. 하루가 다르게 기운이 떨어져간다는 말과는 달리 할머니는 무거운 짐을 잘도 이고 하루 종일 요리와 청소를 하면서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미국에는 괜찮은 놈이 좀 있더냐, 너 좋다는 놈팽이는 없냐, 물으시기에 민영은 계훈을 떠올리고 얘기를 하려다 대충 얼버무렸다. 막내딸의 사위를 잘못 들인 천벌을 받고 있다 자책하는 할머니께 막내 손녀에게 또 비슷한 놈이 꼬이더라는 말은 드릴 수가 없어서였다. 계훈의 성격은 그녀의 친부와 대충 닮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이 계훈에게 마음이 안 간 것도 있지만, 할머니는 듣기만 해도 치를 떨고 혹여나 하는 마음에 내내 가슴을 졸일 것이었다.
 대신에 우연히 룸메이트로 지내게 된 네이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드렸다. 그와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만 제외하고, 제법 괜찮은 다른 나라 친구를 사귀었노라 이야기를 해드리니 할머니는 흥미로워 하시면서도 일면으로 먼 추억을 곱씹으며 공감하기도 하시는 것이었다. 할머니에게도 처녀시절이 있었고, 베트남 전쟁에 우리나라 군인들이 징병될 때 미군 캠프에서 잠깐 일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 만난 외국인 친구와의 기억 중에 소중한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함께 어울리는 지윤과 예진에 대한 이야기도 해드리려고 보니 지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았고 예진에 대해서는 갑자기 새로이 알게 된 것이 많은데 비해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저 손녀 친구면 손녀와 진배없다 하시며 언제든 놀러오라고 하셨지만 그 친구들이 부산까지 내려오려고 할런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민영이 다녀간다는 사실을 부모님께는 넌지시 일러만 두었는데, 반기는 답장은 없더니 막상 들어오고 나자 연락이 왔다. 한국 번호는 정지시켜 두었지만 카카오톡 아이디가 살아있어 그곳으로 보이스톡이 왔다.
 '너는 말도 없이 번호까지 바꿔버렸냐. 니 언니처럼 너도 우리랑 면 끊고 살 거냐.'
 '당연히 정지시켜놨지. 한국 번호 쓸 일이 얼마나 있다고.'
 '맞나. 그래도 들어왔으면 먼저 연락을 해야지.'
 '아빠는 언제 연락했나.'
 '맞나. 줄 거 있다 시간 내서 챙겨가라.'
 '택배로 부치지 않고.'
 '딸내미 얼굴 한 번 보려고. 아빠가 죄가 많다.'
 '알면 됐다. 할머니 오신다 끊자.'
 '그래.'
 아빠가 어디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 관심도 없었지만, 민영은 굳이 묻지 않았고 아빠는 민영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지 주소를 보내지 않았다. 주려고 한 물건이 뭐였는지 민영은 끝내 알 수 없었다. 미국에 돌아갔다 다음 번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럴 줄 알았더라면 굳이 연락을 해봤으려나.

 "그 목걸이는 어디서 산 거야?"
 조수석에 앉은 예진이 그녀를 공항까지 데려다주고 있는 지윤에게 물었다.
 "아 이거. 로켓이라고, 해리포터 읽어봤지? 응, 그 슬리데린 물건. 여기 속에 중요한 사진 같은 거 넣어서 다니는 거야. 옛날에 이태원에서 샀어."
 "오 막 영화에서 총알 맞으면 윽! 하고 그것 때문에 살아나고 그런거지?"
 "잘 조준해서 맞으면 한 발 쯤은 버텨줄지도 모르지."
 "너는 누구 사진 넣어놨어? 우리랑 찍은 사진도 있니?"
 "너가 사진 찍기만하고 우리한테 안 보내주잖아 네 인스타에만 올리고. 여기에 사진은 없고, 비밀번호가 있어."
 지윤은 정면을 응시한 채 가만히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잠시 네비게이션이 버벅이는 동안 지윤은 눈으로 어지러운 표지판을 톺아보느라 미간을 찌푸렸다. 나들목 갈림길이 코앞이었다.
 "비밀번호? 금고 같은 게 있는 거야?"
 "내 외장하드. 거기에 중요한 사진들도 있고, 내 유언장도 있어. 내가 갑자기 죽게 되면 이 로켓을 열어볼거고, 그럼 내가 미리 준비해둔대로 일이 진행될거야."
 "유언장? 왜, 너 어디 아프니? 아플 예정이야? 아팠던 적이 있어?"
 "사람 일 모른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잖아."
 "가끔 무서운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 너는, 우리 중에 제일 건강한 애가. 난 친구들 중에 내가 제일 먼저 죽을 거야."
 예진의 표정은 종종 그렇듯 꿈을 꾸는 듯 몽롱해졌고, 예진에게는 조수석에서의 쓸모를 조금도 기대하지 않은 지윤은 자신의 길 감각이 맞기를 기대하며 왼쪽으로 향했다.
 "슬프지 않으려고?"
 "응! 그리고 친구들은 내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들만 기억할 수 있을 거야! 서른 다섯 즈음에 비운의 여주인공처럼 어느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거지!"
 "넌 그쯤이면 날개가 다 돋아나서 떨어져도 다치지도 않을 걸."
 "날개라, 멋진데? 내꺼 본 적 있어?"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나만 훌쩍 사라지는거네? 사람들은 내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는데 시체는 영영 못 찾고."
 "열린 결말이지. 난 너가 날아가서 살아있다고 믿고 있을게."
 "우리만의 비밀 공간을 만들자!"
 "너가 몰래 날 찾아올 수 있게."
 "나 방금 막 소름 돋은 거 알아? 어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담. 있지, 우리 너무 잘 맞는 것 같지 않아?"
 지윤이 운전을 멈추고 자기를 향해 돌아앉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예진은 지윤을 향해 몸을 틀고 열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윤은 선글라스 너머로 그 모습을 흘깃 쳐다봤지만 특별히 응해주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면 우리 중 하나가 정말 좋은 대화 상대여서 잘 맞춰주고 있거나."
 "아하? 그게 너라는거지 지금?"
 "이쪽 길이 아니었나봐."
 "말을 돌리네?"
 "차를 돌려야겠어."
 "야!"
 하지만 정말이었다. 지윤은 다시 정신을 차린 네비게이션을 예민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예상 도착시간이 길어졌지만 진작 감안해서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시간 내에는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다. 미국은 여러모로 한국보다 시스템이 열악한 부분이 많았다.

 도착해서 예진이 커피라도 사주며 여유 있는 안녕을 하려했지만 길을 헤맨 탓에 시간이 빠듯했다. 둘은 조수석 창문 너머로 급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조심히 가, 죽지 말고."
 "너 정말... 한국에서 봐! 갈게! 잠깐 이리와!"
 예진은 돌연 지윤의 목을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부끄러운 듯 뒤돌아 종종걸음으로 들어갔다. 이따금씩 고개를 돌리며 손을 흔들었지만 지윤은 왼쪽 방향등을 켜고 도로에 합류할 시점을 재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예진은 어려서부터 종종 여자친구들과 진한 스킨십으로 애정표현을 주고받곤 했지만, 지윤이 그런 성격이 아니어서인지 이제 자신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혹은 다양성의 나라 미국의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평소보다 부끄럽고 볼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기록적인 더위가 찾아온 유월이었다.
 회전문을 지나친 예진은 문득 두고 온 것이 생각난 것처럼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지윤의 차는 시야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예진은 무엇을 찾으러 나왔는지 잊어버린 사람처럼 황망히 다시 공항으로 들어갔다.
 비행기 날개가 보이는 자리에 앉은 예진은 평소보다 심한 진동과 소음에 뒤척이며 등에서 돋은 날개를 쓰는 법을 몰라 버벅대는 꿈을 꾸었다. 빨리 날아오르지 않으면 잡혀서 후라이드 치킨이 될 거라고 지윤이 재촉하며 먼저 날아올랐다. 발만 동동이던 그녀는 누군가 뒷목을 그러쥐는 느낌을 받으며 꿈에서 깼다. 목에 둘러진 목베개에 땀이 차 있었다. 예진은 돌아가면 치킨부터 먹어야지 하고 입맛을 다시며 꿈속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