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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0)

by 구운체리 2021. 12. 27.

10.
 예진의 한국 일정은 내한한 슈퍼스타의 그것을 방불케 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본인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놓았는지 몰라 일정을 조율하는데 애를 먹었다. 가족 관련 모임에만 꼬박 4일을 투자해야했다. 그녀의 귀국에 맞추어 부모님이 휴가를 내고 주말을 낀 캠핑 일정을 잡은 것이다. 아직 초년차 직장인인 오빠는 주말에만 잠시 들르기로 했다. 자신과 상의도 없이 잡은 일정이지만 예진은 차마 어떤 불평도 할 수 없었다. 가족들 내에서 예진은 여전히 귀염둥이 아가였다. 미국에 간 뒤로 1년 만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것이니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진은 민영에 대한 탐구 또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부산까지 다녀오려면 왕복으로만 하루가 꼬박 흘렀다. 비행기를 타면 빠르겠지만 그러려면 더더욱 꼼꼼하게 일정에 매여야했다. 예진의 묘안은, 캠핑을 동남쪽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었다. 원래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계곡으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기왕 날짜를 오래 잡은 김에 멀고 새로운 곳에 가보자는 이유를 댔다. 그러고 예진은 중간에 민영을 만나고 오던가 가족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하루를 더 써서 민영을 만나러 가면 될 것이었다. 계획은 완벽했지만, 혹시나 자신의 가족들이 민영을 초대하고 싶어하거나 민영이 자신의 가족들을 우연히라도 보게 될 것을 걱정하기는 했다. 민영에게 얘기해놓은 가정의 모습과는 제법 달랐기도 하고, 민영의 가정사를 보다 깊게 캐내려면 자신의 가정사는 가능한 어둡게 포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민영은 할머니 댁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이 없었기에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예진은 그걸 몰랐다. 지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꼼꼼하게 최적의 스케줄을 짜내어 소화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며, 입술에 남은 지윤의 볼의 감촉을 쓰다듬었다. 도착했다는 연락에 지윤에게선 아직 답장이 없었다. 민영의 SNS 또한 유례없이 잠잠했다. 예진은 문득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민영은 내내 할머니와의 소중한 시간만을 보내다 체감상 10키로는 불어난 채로 미국에 돌아왔다. 예진은 가족들과의 의견 조율이 어쩌고 하면서 대답을 얼버무리더니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지윤은 미국에서 중요한 것들을 도둑맞아 정신이 없고 경찰의 연락을 기다려야해서 한국행을 취소했다고 했다. 공항에 도착해서야 아빠에게 왔던 전화가 생각났지만, 그 이후로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미련을 거두었다. 정히 중요한 물건이라면 돈이 조금 들더라도 국제우편 등을 통해 보낼 수 있는 것이고, 얼굴을 보고 싶으면 영상통화를 하면 된다. 안 할 거지만.
 민영은 지윤에게 미국에 돌아가면 다닐만한 페스티벌이나 파티, 네트워킹 행사 등을 최대한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파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이지만 정작 진심으로 즐기고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지윤이었다. 민영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아도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지윤 쪽이 훨씬 많았다. 영어도 지윤이 잘했고. 공항에 도착하자 지윤이 그녀를 반갑게 맞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와, 잠깐 못 본 사이에... 뭐가 많이 늘었네?"
 "쉿. 테니스하면 살 좀 빠짐? 나 좀 데려가, 이번엔 진짜 배울게."
 한눈에 봐도 민영은 훨씬 퉁퉁해져 있었고, 잠깐의 말줄임표 사이에 지윤은 그녀의 증량에 대한 경외를 완곡하게 놀릴 수 있는 어휘를 고민했다. 그리고는 전에 그녀에게 대쉬한 적 있던 계훈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그는 지금 출구에서 비상등을 켜고 기다리고 있었다.
 "너한테 말을 못했는데, 강계훈이 라이드 와줬어."
 "누구? 크리스 걔? 오 시발. 너네 사귀니?"
 "아니, 일단 가자. 눈 작게 뜨지마, 절대 아니야."
 "잤어?"
 "요놈의 주둥아리!"
 지윤은 민영의 입술을 찰싹 때리고는 그녀의 짐을 빼앗아 앞장섰다. 민영은 자신의 뱃살을 쓰다듬으며 숨을 흡 들이마시고 뒤따라갔다. 그런다고 통통해진 볼살을 감출 수 없다는 건 물론 알고 있었지만.

 계훈과 민영 사이에 어떤 종류의 기류도 흐르지 않는 건 분명했지만 민영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계훈과 지윤 사이의 분위기가 서로 지나치게 편해진 것이라던가 계훈이 지윤과 민영 누구에게도 예전처럼 으스대는 기운을 풍기지 않는다던가. 둘이 사귀던 자던 민영이 아쉬울 건 없지만, 괜히 못마땅했다. '지윤이 아깝고, 둘이 안 어울려.‘
 하지만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지윤이 야생동물인 계훈을 길들인 것 같아보였다. 계훈은 고분고분했고 어딘가 지쳐 보이기도 했다. 아주 다른 사람 같아서 다시 대쉬한다면 이전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법 하다고 느꼈다. 자신이 아버지 같은 남자를 피한다는 강박에 빠져 너무 빠르게 사람을 판단한 것은 아닌가 고민하며.
 그런 한편에서 계훈은 자신만의 고민들로 정신이 시끄럽고 복잡한 와중에 민영의 변한 캐릭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덕이 후하게 불어난 듯한 인상과 장시간 비행을 위해 타협한 편안한 차림 그리고 내내 입 다물고 조용히 들으며 지켜보는 모습에서 자애로운 모성을 느꼈다. 모든 여자들이 엄마로 보이기 시작했나 싶어 옆을 보면 지윤의 그것과는 또 달랐다. 지윤을 자신을 향한 모성을 뿜고 있었고 민영은 그냥 남의 엄마 같았다. 무슨 생각으로 민영에게 대쉬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지윤이 경찰서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아주 운이 좋게도 다른 범죄현장을 수사하던 과정에서 장물로 나온 그녀의 노트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비록 다른 물건들은 찾지 못했지만 지윤에게 가장 필요했던 물건이 노트북이었기에 지윤은 당장 달려가겠노라 대답했다. 마침 경로 상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지윤은 민영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활짝 웃었다. 정말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콧잔등 찡그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이 럭키 걸, 레이첼!"
 지윤은 자신의 노트북을 되찾고 기분이 좋아져 저녁을 사겠다고 했고, 셋은 예의 그 지중해 음식점에 방문했다. 혼자만 못 가본 곳이라 내심 벼르고 있었다.

 식사를 거의 마치고 계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민영은 지윤을 쿡쿡 찔렀다.
 "저 사람 요즘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누구, 계훈이? 좀 기운이 없어 보이긴 하지. 그래도 똑같아."
 "너랑 있을 땐 되게 순하다. 너네 진짜 아무 일 없었어?"
 "별 거 아냐, 둘만 있을 때 말해줄게. 사귀는 건 아니야. 잔 것도 아니고."
 "뭐가 있긴 있네. 오키 흥미로워. 아 참, 너 혹시 예진이 팔목 본 적 있음?"
 "글쎄, 있을걸? 왜, 너처럼 뭐 흉터라도 있대?"
 계훈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민영은 입을 다물었지만 눈빛으로 그렇다는 표정과 궁금하다는 표정을 동시에 지었다. 지윤은 어깨를 으쓱하고 입을 내밀며 '내가 어떻게 알아'라고 응답했다.
 "민영아 너... 아니다."
 "뭡니까?"
 계훈이 퍼뜩 뭔가 떠오른 듯 민영에게 말을 걸다가 지윤의 눈치를 보고 그만두자 민영은 더욱 깊어진 의심의 눈초리로 지윤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인상을 찌푸리며 '내가 어떻게 알아'라고 다시 응답했다.
 "이제 가자, 돌아가서 술이라도 한잔 더 할까?"
 "피곤합니다. 난기류 때문에 한 숨도 못 잤어요, 진심. 진짜 추락하는 줄. 나도 너처럼 미리 유서를 써 두는건데."
 이번엔 계훈이 무슨 소리냐고 눈짓으로 물었고 지윤이 로켓을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 여기 담긴 게 내 유언장. 잠도 안 오고 추락도 안 했는데 그거나 써두지 그랬어."
 "생각해봤는데 남길 게 없더라. 알지, 너도. 그냥 묘비에 그 사람처럼만 적어주면 돼, 누구냐 그..."
 "우물쭈물 하다가?"
 "맞아 그 사람.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가면서 얘기하자 레이디스."
 "내가 운전할까? 선배 맥주 한 잔 마셨잖아."
 "괜찮아 나 멀쩡해, 여긴 미국이잖아."
 "예의상 물어봤어."
 계훈은 민영과 지윤을 차례로 내려주고 사라졌다. 민영과 지윤은 메신저로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뭐야, 너한테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약점까지는 아닌데, 술 먹고 나한테 뽀뽀했어.]
[???????????]
[키스는 아니고 볼에다가만 살짝. 어린 애가 엄마한테 하듯이.]
[대박. 그게 훨 충격. 차라리 가슴을 만졌다고 해줘 제발, 징그러워.]
[나도 잘 기억은 안 나. 너무 취해서 그날. 근데 그것만 기억이 나서 다음 날 물어봤거든, 우리 무슨 일이었냐고.]
[나 비행기 멀미가 안 멎은 듯. 토하고 오는 동안 계속 치고 있어줘.]
[Mean girl. 이거까지 듣고 가. 다음 날 만나서 얘기하는데 강계훈이 한 번 더 해도 되냐고 물어봤다.]
[야 제발.]
[술이 덜 깼나 싶어서 인중을 때릴라니까 막고서는 얼굴을 들이밀더라고.]
[미친, 범죄야 그거! 그것도 미국에서!]
[알지, 내가 불편해하니까 카운터 직원도 노려보더라. 근데 지가 멈췄어, 사과하면서.]
[미수야 미수! 성폭행은 아니고 뭐야 아무튼 미수!]
[요새 자기가 너무 이해받지 못해서 외롭고 힘든데, 또 내가 너무 편하고 좋대.]
[씨발! 선범죄 후고백 한다고 용서가 되지는 않아! 지금이라도 신고하자!]
[근데 만나면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대. 기분이 너무 이상하대, 마치 자기가 게이라도 된 것처럼.]
[으으 점점 더 좆같아지는데 언제 끝나냐.]
[아냐 그런 불편한 분위기 아니었어. 너 상상되니? 강계훈이 그렇게 자기 속마음 솔직하게 털어놓는 거?]
[지윤아, 가스라이팅이라고 알아?]
[그래도 내 파트너고, 필요할 때 도움도 많이 됐고, 해를 끼치지도 않고. 되게 바보 같은 사람이라 다른 애들이 싫어하는 거 아는데 난 밉지가 않다.]
[음... 응원해. 난 네 편이야. 알지?]
[그게 다야. 봤다시피 우린 좋은 친구야.]
[강계훈이 너 진심 좋아하는 거 같은데. 찐사랑이 처음이라 그게 사랑인 줄을 모르는 거 아냐? 뽀뽀도 했다며.]
[뽀뽀는 예진이도 했어. 그날 무슨 두 사람한테 양쪽 볼을 그냥.]
[함예진도 너 진심 사랑하나보지. 난 강계훈이랑 키스는 해도 뽀뽀는 못할 듯. 아, 생각만 했는데 또 역겨워졌다.]
[아 맞다, 아까 얘기한 예진이 팔목 그거는 무슨 뜻이야?]
[잠시만, 밖에 누구 왔나보다.]
[이 시간에?]

민영의 대답은 한참 뒤에야 돌아왔다.

[이 미친 새끼 어떡하지?]
[?]
[강계훈 이새끼 우리 집 왔어.]
[엥?]
[나한테 한번 하재.]
[???]
[술 겁나 취했나봐. 내 룸메가 제압해서 묶어놨는데 이거 경찰에 넘겨야되냐? 얘 떫도 피나봐. 냄새 오져.]
[하...ㅠㅠ 왜 그러냐 그 인간 진짜...ㅠㅠ]
[내 룸메가 교육해주고 있어. 얘가 게이거든. 정 하고 싶으면 자기랑 할 거냐고 화내면서 혼내는 중. 웃을 일은 아닌데 개 웃기네 이거.]
[너 룸메가 게이였냐. 그건 또 몰랐네.]
[아무리 나라도 이성애자 남자랑 동거는 좀.]
[아니 남자인 것도 몰랐는데.]
[맞나. 강계훈 잠들었나보다. 야 오늘 우리 방 와서 잘래?]
[동아리 사람들 불러서 강계훈 치워줄까?]
[ㄴㄴ 다시 깨서 개지랄하면 바로 경찰 부를거임. 니 새끼니까 니가 책임지셈. 그리고 타자치는 거 답답해. 만나서 얘기하게 얼른 건너와.]
[ㅇㅋ 금방 감, 미안해 정말 내 잘못은 아니지만.]
[ㅋㅋ룸메한테 얘기해놓을게.]
[아 너무 미안한데 룸메 혹시 뭐 좋아해? 선물 사갈까?]
[ㅋㅋㅋㅋㅋㅋ 몸 좋은 남자 바텀 좋아한대. 이미 받았다고 괜찮대.]
[ㅠㅠ 가는 중 이따 봐.]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