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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1)

by 구운체리 2021. 12. 29.

11.
 "일어나봐요 이 씹새끼야."
 계훈은 불편한 자세로 잠에서 깼다. 술 냄새와 역한 풀냄새가 났고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노끈 같은 것으로 꽁꽁 묶여 있었는데 힘으로 끊으려다 파고든 부분들에 피가 통하지를 않았다. 모르는 집이었다. 처음 보는 흑인 남자애랑 민영이 그녀를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민영은 날카로운 가위를 들고 있었다.
 "난리치면 다쳐. 이제부터 묶은 거 풀어줄건데, 허튼 수작 부리면 손이 엇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애. 이 가위는 굉장히 날카롭습니다. 이해했으면 고개 까딱."
 계훈은 순간 자신이 납치된 줄 알고 겁에 질려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결국에 어딘가에 팔려가는 것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는가. 참 아쉽고 한심한 삶이었노라. 서걱대는 가위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힘으로 민영을 제압하고 협박하면 남자애가 어떤 식으로 나올 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멀리서 지윤의 모습이 보였다. 소리를 지르려다 딱히 입을 막아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신의 토사물을 닦은 것으로 추정되는 걸레만이 물려져 있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계훈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파닥거리다 넘어져 바닥에서 끙끙대는 우스운 꼴이 되었다.
 "아이 씨발, 다친다니까 움직이고 지랄이야."
 민영의 손이 잠깐 깔려 욕을 뱉었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네이선이 무게를 실어 그의 가슴을 찍어 눌러 제압했다. 지윤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제 일 기억은 나냐?"
 계훈은 그제야 민영을 보고 눈을 굴렸다. 어제 자신은 민영과 지윤을 차례로 내려주고 다시 번화가로 돌아와 주차를 하고 가까운 바에 들어가 이전에 킵해둔 양주를 주문했다. 홀짝홀짝 마시는 동안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가 말을 걸면 피하는듯한 눈치를 보였다. 내가 더 이상 매력이 없나? 남자로써의 쓸모가 없어진 것일까? 계훈은 갑자기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욕이 들끓는 기분을 느꼈다. 저번에 그 히스패닉 여자랑이라도 한 번 해서 욕구를 풀어야겠다, 생각했고 그녀의 집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길에 필름이 끊겼다. 계훈은 눈을 꿈벅이며 민영을 쳐다보았다.
 "내가 혹시 어제 무슨 실수했니?"
 "그 실수 지금 현재 진행형인거 모르겠니? 어제 니가 한 말 기억 못할까봐 내가 녹음도 했어."
 민영은 핸드폰을 들이밀며 녹음본을 재생했다. 네이선의 목소리와 우당탕거리는 소음이 잠시 지나고 그의 혀 꼬인 목소리가 들렸다.
 '...하자고! 너 졸라 뚱뚱하고 얼굴도 내 타입 아니지만! 한번 하고 나 좀 살려주라! 너도 좋아하잖아! 응? 함만 더 하자!'
 그리고 무슨 뜻인지 묻는 네이선과 대답하는 민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몇 번의 북소리가 이어서 들렸는데 아마 네이선이 그를 좀 두들겨 팬 모양이었다. 격투에 소질이 있는지 깔끔하고 둔탁한 몇 번의 타격으로 계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 끙끙대는 듯 했다. 녹음본은 거기서 끝났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할 말이 없다. 술이 너무 취해서..."
 "좆을 까세요. 평소에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살면 술 취했다고 그런 언행이 튀어나와? 그리고 뭐 졸라 뚱뚱? 너도 요즘 졸라 부은 거 알고는 있냐?"
 "너한테 한 말이 아니야, 미안하다 정말."
 "씨발 놈이 진짜. 아니 이건 지금 알았네, 한번만 더는 뭐야? 너 전에도 나랑 잤다고 얘기하고 다녔냐?"
 "진짜 너한테 오려던 게 아니었어, 믿어주라."
 "지윤이가 널 얼마나 좋게 봐주고 있는데, 이 더러운 새끼야. 꺼져 그냥. 우리 앞에 나타나지마라. 이거, 녹음본 평생 안 지울 거야. 다시 나타나면 넌 평생 매장이야. 알아들어?"
 계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울고 있었다.
 "질질 짜지말고 이제 꺼지라고!"
 계훈은 다시 한 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미안'을 되뇌이며 지윤을 슬쩍 돌아보려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난리를 피운 것에 대한 자세한 소문이 퍼지지는 않았지만 계훈이 테니스 동아리를 그만두고 한인 모임 등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었겠거니 짐작했다.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붙어다니던 지윤이 그를 적극적으로 두둔해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둘 사이의 문제가 시발점이리라고 다들 짐작했다.

 루머가 그녀들의 편에 서 있던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이 지윤과 민영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관련이 없는 제3자의 이야기에는 둘 다 관심이 없어 굳이 끼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계훈의 일에서 둘은 제법 중심에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해, 그의 지나간 행적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상세하게 듣게 되었다.
 우선 지난 학기 성적을 전체적으로 망쳤다고 했다. 본인 말로는 교과서 전체를 외워서 이해하고 관련된 심화 논문들까지 공부했는데 교수의 평가 기준이 형편이 없다며 성적 관련 이의제기를 굉장히 무례하게 걸었다고 했다. 학습 능력만큼이나 사람됨을 중요시하는 학풍에서 그의 행동은 즉시 퇴학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전까지 보여줬던 태도들을 감안하여 순간적으로 급등한 학구열로 인한 지식의 저주, 그 과정에서의 스트레스, 기록적인 그 해 여름의 더위가 불러온 개인적 참사로 여기고 한 번의 기회를 더 받았다고 했다. 방학 동안 심리 상담 치료를 열심히 받는 조건이 붙었다.
 모욕을 당한 교수는 그에게 낙제점을 주었고 다시는 그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계훈은 졸업에 반드시 필요한 해당 과목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 다른 교수가 그 수업을 맡을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계훈이 미쳐서 껄떡댄 여학생들 또한 제법 많았다. 교내 카페에서 가까이에 앉아있기만 해도 쪽지를 보냈고 오래 알고지낸 친구들에게도 들이댔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지윤을 대한 태도는 제법 진실하고 얌전한 구석이 있어 지윤은 그만큼 그를 안타깝게 여겼지만, 민영에게 한 짓을 용서할 수는 없어 다시 친구로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가 다른 곳에서 정상적인 삶을 되찾기를 바랄 뿐이었다.
 전해듣지는 못했지만, 계훈이 예진과 지윤을 만난 밋업 행사에서도 어느 기업 관계자에게 자신을 인턴 단계도 건너뛰고 정식 직원으로 채용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다 망신을 당하고 쫓겨난 것이었다. 계훈에게는 치료가 필요했지만 그것을 인지할 능력도 주변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내심 고소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있었지만, 결국 자업자득이었다.
 그렇게 그는 공동체의 흑역사로 잊혀지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