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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9)

by 구운체리 2021. 12. 24.

9.
 지윤은 공항을 지나 바닷가로 향했다. 차를 잠깐 세워두고 바다를 보고 온 사이 지윤의 차는 좀도둑들을 만났다.
 유료주차장에 자리가 없고 비교적 큰 거리인데다 대낮이니 잠깐이면 괜찮을거라 생각했지만, 누군지 모르는 그들은 대담하고 망설임 없이 운전석 유리창을 부수고 문을 열어 돈이 될 법한 물건들을 전부 가져갔다. 차량용 블랙박스와 휴대폰 거치대, 읽을 책과 노트북이 들어있는 그녀의 백팩, 그리고 예진이 선물로 두고 간 이쁜 꽃무늬로 포장된 -화장품으로 추정되는 크기의- 무언가. 만약을 대비해 여권을 몸에 소지하고 있던 습관 덕에 그나마 귀찮음을 덜었지만, 아직 공유 서버에 업로드하지 않아 로컬에만 저장되어 있는 노트북의 파일들이 생각나니 정신이 아득했다.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차였을텐데, 차량이 오래된 기종이라 충격 감지 알람 기능 등이 탑재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표적이 된 것 같았다. 날이 더워서 짐을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잠시 멍하니 박살난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던 지윤은 차량을 대여해 준 회사에 전화를 했고, 안내에 따라 경찰서에도 들러 사고 접수를 했다. 대사관에도 알려서 도움을 받아야하나 싶었지만, 미국 생활 선배들에게 먼저 의견을 구해봐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계훈이었다. 계훈은 곧바로 차를 몰고 데리러 오려했지만, 지윤이 빌린 차를 운전해서 원래 있던 곳에 반납하기로 했으므로 택시를 타고 와주었다. 달리는 동안 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제외하면 운행에는 문제가 없었다.
 경찰은 성실하게 사건을 접수받으면서도 의욕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류의 사건이 비일비재하며 피해액이 소액이라 장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계훈이 언성을 높이며 대신 실랑이를 벌였지만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계훈은 식식대며 직접 거리를 뒤져볼 기세로 나섰으나 경찰들도 허튼 짓 말라고 경고했고 지윤 또한 목숨까지 걸 생각은 없었다. 백주대낮에 대로변의 차창을 깨부수는 인간이라면 사람의 대가리를 총알로 깨부수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예진에게 했던 말과 달리 로켓이 그녀 대신 총을 맞아줄 것이라는 기대는 조금도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설상가상으로 소나기가 내렸다. 지윤 대신 운전대를 잡은 계훈은 홀딱 젖어가는 채로 전방을 주시하며 쌍욕을 퍼부었고 지윤은 어이가 없는 상황에 실성한 사람처럼 크게 웃기 시작했다. 계훈이 깜짝 놀라 쳐다보자 그녀는 멀쩡한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함께 비를 맞고 있었다. 그냥 맞는 정도가 아니라 한 방울이라도 허투로 맞을까 상반신을 반쯤 창문 밖으로 내밀고 미친 사람처럼 물방울을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뭐하는거야, 젖고 있잖아!"
 "선배 혼자서만 신나는 것 같아서 질투나! 나도 젖을 거야!"
 "너 대신 젖으려고 운전해주는 의미가 없잖아 그러면!"
 "나 대신 젖어달라고 부른 거 아니야! 좋은 건 같이 하자!"
 "그럼 몸이라도 집어넣어 위험하니까!"
 빗소리와 엔진소리와 창밖의 소음 등등 때문에 둘은 소리를 지르듯 대화를 해야 했는데, 큰 소리를 내다보니 기분이 들뜨고 좋아졌다. 계훈은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고 지윤은 기분이 엿 같아서 쉬고 싶었지만 이런 날일수록 마셔야 한다는 말에 설득당해 학교에서 멀지 않은 펍으로 향했다. 멀리까지 달려와 함께해준 계훈에게 겸사겸사 보답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누군가의 생일인지 펍은 시끌벅적했고 가운데 스테이지에서는 춤판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골든벨을 울려 술집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양주 한 샷 씩을 선물했다. 별도로 주문한 맥주 외에 공짜로 얻어먹은 양주만으로도 둘은 취기가 오를 만큼이 되었다. 술이 제법 취하자 지윤은 파티의 주인공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함께 춤을 췄고, 마찬가지로 인사불성이 된 파티의 주인공들은 열렬히 환호하고 기뻐했다. 지윤은 그들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술을 먹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나 엽기적인 자세와 표정을 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는데, 그 사진을 전달받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은 계훈 밖에 없었다.
 계훈은 그런 지윤을 보며 멋지다고 생각했다. 동생 또는 여자에게서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경외심이었다. 원래였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파티의 스포트라이트를 가로채려고 날뛰었겠지만 요즈음 계훈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운전을 하며 젖은 몸을 말리지 못해 찝찝한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술집에는 머리에 맥주를 들이붓거나 격렬한 춤사위로 인해 땀에 젖은 사람들이 많았다. 계훈은 멀찌감치 떨어져 잔을 홀짝이며 지켜보다 술과 대마에 취해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어떤 히스패닉 여자애의 손에 이끌려 다음 날 그녀의 집에서 나체로 깨어났다.
 이름도 모르는 그녀는 코를 골며 뻗어있었고, 계훈은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의 기억이 없었다. 쾌락 없는 잠자리는 처음이라 기분이 영 더러웠다. 슬쩍 보니 여자의 얼굴도 몸도 자신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혹시라도 자신과 이 여자가 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불편할 것도 같았다. 자기는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계훈은 비강에 남아있는 향을 되새기며 기억도 안 나는 와중에 대마까지 피웠구나 깨달았다. 그는 옷을 챙겨입고 나오는 길에 대마로 보이는 것을 몇 대 주머니에 쑤셔넣고 나왔다. 나와서 지도를 보니 술집으로부터 차로 15분은 걸리는 위치였다. 지윤에게 어제 어떻게 들어갔는지 묻는 메세지를 남기고 계훈은 리프트를 불렀다. 집에 돌아갈 때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지윤은 자신의 방에서 느지막히 눈을 떴다. 어제 일어난 일들이 전부 꿈만 같고 지금의 두통이 현실의 전부였다. 자신의 필름도 핸드폰 전원도 끊겨있었다. 충전기를 꽂고 찬물을 들이키며 지윤은 차분히 어제 일어난 일들을 역순으로 복기했다.
 도망이라도 치는 듯이 기숙사까지 쉬지 않고 뛰어서 들어온 기억.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지르다 누군가의 제지를 받은 기억. 부둥켜안고 춤을 추다 만난 키 큰 백인 남자애가 허리에 손을 두르다 놀란 그녀가 제지하자 웃으며 물러난 기억. 무대에 올라가 스스로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있다고 상상하며 마구 몸을 흔들며 무대를 뒤집어놓고 군중의 환호를 이끌어냈던 기억, 혼자만 남겨두고 계훈이 물러나자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기억, 계훈의 멱살을 잡고 사람들이 춤을 추는 메인 스테이지로 끌고 갔던 기억. 직전에는 계훈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왼쪽 뺨에 입맞춤을 했다. 누군가가 무료로 돌린 양주를 잔뜩 먹고 취했고, 창문을 열고 달리며 비에 흠뻑 젖었다. 계훈이 그녀를 도와주러 와주었고, 차에 도둑이 들었다. 예진의 선물을 잃어버렸고 예진이 오른 뺨에 입맞춤을 했다.
 전원이 들어오자 계훈과 예진에게 연락이 와있었다. 잘 들어갔는지 묻고, 잘 도착했다고 알리는 내용이었다. 선물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아직 하지 못했다. 카카오톡에는 왜 전화를 받지 않냐며 그녀의 한국행 일정을 재차 묻는, 미국 시각으로는 새벽에 전화를 한 것이 분명한 어머니의 메세지 기록과 모르는 계정으로부터 온 알람이 하나 있었다. 열어보니 민영의 한국 계정인데 이번에 들어와서 부산에 들를 의향이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예진과 민영의 미국 번호 계정의 4인으로 구성된 단톡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습관적으로 노트북을 열어 일정을 확인하려다 어제 잃어버렸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그녀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조깅을 나섰다. 다소 위험하지만 숙취에서 깨고 정신을 차리는데 땀 빼는 운동만한 것이 없었다. 테니스와 달리 달리기는 적당히 조절만 잘하면 부상의 위험도 적었다. 숨이 조금 벅찰 즈음 속도를 더욱 높이며 지윤은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정리했다.
 아무래도 한국행 비행기를 미루거나 취소하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노트북 대여 서비스가 방학 중에도 가능한지 알아보고, 중요한 문서 중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목록화하고, 예진에게 연락해 선물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경찰서에 전화해 진척이 있는지 알아보고, 계훈에게 대충 답장을 하고, 문서를 복구하고, 본가에 연락을 취해야겠다, 아 졸라 숨차고 힘들어.
 거친 숨과 땀에서도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지윤은 찬물에 샤워를 하며 그 모든 잡념들을 씻어 흘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