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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3)

by 구운체리 2022. 1. 3.

13.
 개강 전까지 셋의 어색한 관계는 이어졌다. 민영은 자신의 건강이 원래 목표 이상으로 좋아졌음을 확인한 뒤로 운동을 그만두었다. 말을 잘못 전달한데에 대한 미안함과 예진에 대한 찜찜함 때문에 민영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고, 지윤 또한 예진의 마음상태가 어떤지 몰라 민영이 먼저 나서서 어떻게 해주겠지 하고 기다렸다. 마음이 열리지 않았는데 먼저 다가갔다가는 영영 도망가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예진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감정이 바빴다.
 예진이 원래 잡혀있던 약속들을 대부분 취소하고 민영이나 지윤과도 함께 다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지윤은 처음에는 그녀를 걱정했다. 그리고 그녀가 연애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한편으로 안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함을 느꼈다. 자신들과의 감정적인 교류를 끊어버린 것일까. 말을 아낀 자신에 대한 소심한 복수일까 아주 차갑게 마음이 돌아선 것일까 혹은 너무 급하게 타오른 불꽃이라 전달할 겨를조차 없었던 것일까. 두 번째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대상이 계훈이라는 소문은 믿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던 계훈의 차가 자신의 집 근처를 지나가는 것을 본 것 같다고 민영이 말했지만,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기로 했다.

 "맞아! 나 계훈 오빠랑 만나는 중이야!"
 둘의 걱정과 달리 오랜만에 셋이 모이게 되자 예진은 해맑게 대답했다. 잠시 토라져서 연락이 소홀해진 동안 마찬가지로 외톨이가 된 계훈에게 연락을 해보았고 얘기를 나누다보니 잘 통하는 것 같아 연애를 하게 되었다고. 거기까지의 진도가 너무 빨라 먼저 연락을 못했다고 했다.
 "너, 거짓말이 서툰 아이구나."
 민영은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먼저 자리를 떴다. 지윤이 일어나 붙잡으려다 따라 나가지는 못하고 예진의 눈치를 보며 도로 앉게 되었다. 예진은 여전히 밝은 척을 하며 가만히 앉아있었지만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것은 감추지 못했다. 민영이 당했던 일과 그녀가 열심히 감추려하는 여린 속마음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윤은 문득 이 두 친구의 감정선이 벅차게 느껴졌다.

 "나 또 들켰나봐. 거짓말." 예진은 아주 얼굴을 파묻었다. 민영이 나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 완전 거짓말쟁이야. 내 인생은 전부 다 거짓말이야. 난 쓰레기같은 년이야."
 지윤은 예진을 달래주기 위해 팔목을 잡고 등을 토닥이며 목을 그러안아 끌어안으려다 무심결에 그녀의 팔 안쪽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돌아온 뒤로 예진은 목과 팔에 잔뜩 두르던 수많은 장신구들 대신 새로운 반지 하나와 목걸이 하나만을 걸고 있었다. 예진의 깨끗한 팔목에 민영이 말했던 흉터같은 것은 없었다.
 "너도 알고 있었어? 내 거짓말? 언제부터? 그것 땜에 날 싫어한거야?"
 "무슨 말이야, 진정하고 얘기해봐. 내가 너를 왜 싫어하니."
 "그래서 내 선물도 잃어버리고, 연락도 안하고, 데리러 오지도 않고,"
 "아니야, 내가 미안해, 정말로 정신이 없었어서 그랬어. 내가 나빴어."
 "지금도 그런 식이잖아! 난 너가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거란 말이야!"
 지윤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여기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다는 생각과 그 정도 무게의 인연이면 애써 더 붙들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내가 미안해. 대신에 너 우는 동안 곁에서 지키고 있을게. 너가 가라고 할 때까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미안해."
 "이 목걸이. 너랑 비슷한 걸로 사려고 이태원을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 못 찾았어. 인터넷에서 비슷한 물건 판다는 사람을 겨우 찾았는데 너무 멀리 살아서 시간이 맞지를 않더라. 어렵게 부탁해서 출국하는 날 공항에서 퀵으로 받았어. 너가 알아봐줬으면 했어."
 진정이 된 예진이 겨우 말을 꺼내자 그제서야 예진의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것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훨씬 고급진 재료로 만든 물건 같았다. 아마도 이태원 장사꾼이 저 원본을 본따 대충 만들고 삼천원에 판 거겠지. 지윤은 확실히 예진에게 신경을 덜 쓰고 있었기는 했다. 지윤은 잠시 미안한 감정이 올라왔다. 눈물이 잠깐 고일 뻔 했는데 예진의 말이 이어졌다.
 "너처럼 사랑만 받고 자란 애는 몰라. 우리같이 불쌍한 사람들한테 어떤 위로가 필요한지."
 "너도 모르잖아."
 예진은 응석어린 얼굴로 지윤을 쳐다보다 깜짝 놀라 딸꾹질을 했다. 지윤이 울고 있었다. 아니,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눈에서 물만 줄줄 흐르고 있었다. 사람이 저렇게도 울 수가 있는 건가 의아해 딸국질이 나오려던 때 지윤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를 들어서는 울고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는 알아챌 수 없는 명확한 음성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뭐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너도 알려고 한 적 없으면서 짐작만 하고 그대로 믿어버린거잖아."
 "민영이는 달랐어? 계훈 오빠는? 그래서 난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 되지 못한 거야?"
 "민영이는 짐작하지 않아. 날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믿어줘. 너도 그래줬으면 했어. 넌 내 소중한 친구니까. 강계훈은 거기서 왜 나오는 거야 그 정도로 아끼는 사이도 아닌데."
 "그럼 난 계훈 오빠를 왜 만난거지?"
 예진은 다시 울기 시작했고 지윤은 순간의 북받쳐 오른 감정이 정리되자 눈물을 그쳤다. 민영과 예진에 대한 감정이 방금 말을 하면서 동시에 정리가 되었고, 스스로도 깨달았다. 감정을 스스로 억제하느라 몰랐지만 지윤은 그만큼 두 친구를 아끼고 있었다.
 "내가 아끼는 사람이라서 너가 만나러 간 거라는 뜻이야?"
 "연애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시작은 분명 그랬어. 어쩌면 전부 다 그랬나봐. 난 정말 모르겠어."
 예진은 다시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하지만 아까의 가시 돋친 경계심은 풀린 것 같아 지윤은 우선 예진을 끌어안고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결국 예진은 지윤의 고민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고 지윤은 예진이 말한 문장 하나하나를 기억해두며 캐묻고 싶었지만 때가 아닌 것 같아 묻어두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예진아, 좀 걸을까."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언제나 이성과 감성을 망라하여 당장의 상황에 필요한 이상적인 대화를 이끌어 나갈 수는 없었다. 그저 서툴지만 포기하지 않고 내일 다시 또 꾸준히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만 있으면 됐다. 지윤은 내일 다시 예진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가끔은 이렇게 말없이 발맞춰 걷는 것만으로 그런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새 예진은 지윤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지윤에게는 그 전날 새벽 어김없이 시차를 고려하지 않은 전화가 집으로부터 걸려왔었다. 계훈과 그녀의 관계에 대해 너저분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과 그녀가 한국행 비행기를 취소하고 물건을 잃어버리고 다니는 것에 대해 두서없이 다그치는 내용이었다. 셋이 정말 오랜만에 모이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지윤은 집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기분의 하루였다. 
 예진은 민영이 집에 다녀간 다음 날 아버지로부터 장문의 메세지를 받았다. 그녀가 가족에 관해 떠들고 다니던 거짓말을 보게 된 것이다. 그녀가 민영과 지윤의 메신저 내용을 본 것처럼, 아버지도 그녀와 민영이 한국에서 나눈 메신저 내용을 봐버렸다고 했다.
 언제나 밝고 명랑한 막내딸이 품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을 몰랐다며 한참을 혼자 우셨다고 했다. 먼저 얘기를 꺼내주지 않을까 기다리고 운도 띄워봤지만 태연하게 숨기는 모습이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고. 예진은 화들짝 놀라 민영에게 보낸 카톡을 열어보고 자책으로 하루를 보냈다. 부모님과 오빠에 대한 철없는 비난과 실제로는 아주 만족했던 여행지에 대한 근본 없는 험담,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낸 그녀의 배경에 대한 넋두리까지. 이 모든 것이 지어낸 거짓말이라면 누가 믿을까. 도저히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 예진은 우선 그 일을 미뤄두는 수밖에 없었다.
\[오해예요 아빠, 정말 미안해. 내가 나중에 다 설명할테니 다른 가족들한테 말하지 말아줘요. 늦지 않게 연락할게. 사랑해요, 진심으로.]
 습관처럼 붙이던 사랑해요 뒤의 온점을 지우고 몇 자를 적어 넣으며, 예진은 도저히 다시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게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우울에서 헤엄치다 지윤과 계훈이 문득 떠오르며 둘의 소중한 관계에 질투가 나기 시작했다. 계훈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고, 전화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다. 사막에서 물이라도 찾는 듯 계훈은 그녀의 관심을 달갑게 여겼고, 그렇게 자괴감의 늪에 빠진 두 사람은 아무 대화도 없이 엮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