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5)

by 구운체리 2022. 1. 7.

15.
 세 친구는 각자의 전공이 세분화되며 수업 시간표를 맞추기란 쉽지 않아졌다. 애초에 민영과 지윤은 함께하는 점심시간을 확보하거나 겹치는 동선 등을 짜 맞추는 데에 열의가 없었고 예진은 연락이 없었다. 지윤이 먼저 가끔 연락을 하면 답장이 오긴 했지만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어딘가 어색한 티가 났다. 예진의 활동 영역이 워낙에 넓어 다른 친구들을 통해서라도 소식을 들을 수 있으려나 싶었지만 계훈과 사랑의 도피를 한 것 같다는 소문 외에는 들을 수 없었다. 캠퍼스에서 아주 사라져버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민영에게는 무슨 새로운 취미가 생긴 건지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고 지윤은 교내에서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이 교류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그룹 단위 방과 후 활동 등에 열심히 참가해보기로 했다. 테니스 동아리에서는 참석률과 실력이 좋은 지윤이 운영진을 맡아주었으면 하는 기색을 비추고 있었는데 영 귀찮지만 막상 자주 마주치다보면 거절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거리를 두고 있던 것이다. 대신 학과장 교수의 추천으로 한인 뿐 아니라 전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아리 선발시험에 지원해 볼 예정이었다.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떠나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개중에 일부는 여전히 민영이나 지윤을 알고 있었다. 천 단위가 넘는 팔로워를 보유한 예진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 셋이 무척 친하게 지내다가 이번 학기에는 각자 찢어져서 조용히 다닌다고 이야기가 돌았는데, 자세한 배경에 대한 이야기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돌았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교집합이 존재할 수 없는 소문들이었지만, 소문이라는 것의 특성상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들의 합집합이 곧 실체인 것처럼 몸집이 불어나있었다.
 학사 일정이 바쁘지 않고 각종 모임들이 학기의 첫 2주 동안 이야기 속의 예진은 임신을 했고 지윤은 칼을 갈며 그녀를 벼르고 있으며 민영은 둘 사이에서 바보가 된 것이 부끄러워 숨어있는 모양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대외활동이 잠잠해진 것이었다.
 실상 민영은 미적분에 빠져있었다. 공대생인 네이선이 가을 학기에 열리는 미적분 대회에 나가기 위해 연습을 한다고 거실에 연습장을 어질러 놓았는데, 지나가다 본 민영이 흥미를 느낀 것이다. 사회학과 언어를 전공하는 그녀가 관심을 보이자 네이선은 흐뭇한 표정으로 기초 잡는 것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민영은 수리 가형을 선택했던 이과 출신이었고 네이선의 기대 이상으로 놀라운 습득력을 보였다.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뒤늦게 깨우친 루키를 발견한 체육관 관장처럼 네이선은 몹시 흥분하여 그녀가 본격적으로 관련 수업을 듣고 자신과 함께 대회를 준비할 것을 설득했다.
 학과에서 여는 소소한 이벤트 차원의 대회였고 얻는 보상도 보잘것없는 상품과 잠깐의 기쁨뿐이었지만, 관심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었고 그런 대회에서 전혀 다른 분야에서 온 민영이 입상만 하더라도 제법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았다. 민영은 투덜대면서도 뭐에 홀린 듯 네이선의 루틴을 따라가고 있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는 나중에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지윤은 한인동아리 사람들을 피해 학교 테니스부의 입부 테스트를 준비하기 위해 지역의 일반인들이 오는 클럽을 찾아 등록한 뒤 연습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근력과 순발력을 키우기 위한 피트니스 운동과 식단까지 병행하고 있었다. 지는 것은 상관없지만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삶에서 두 번은 못 태울 성질의 열정인 것 같아서.
 예진은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계훈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애초에 마음이 움직이지도 않았던 관계이니 정리할 것도 많지 않았지만, 그렇게 잘난 척하던 계훈이 질척이고 있는 것이 문제였었다. '너마저도 떠나가면 난 죽어버릴 것 같다'고 하는 통에 마음이 움직였다가도 민영의 차가운 마지막 표정과 공항에서 봤던 아빠의 씁쓸한 표정을 떠올리면 눈이 떠지고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미 자신의 마음은 떠나있었고 그것을 납득시키는 것만이 과제였지만, 여의치 않다면 최소한 자신이 떠난 것을 발판삼아 위험한 선택만큼은 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두고 싶었다. 상투적이고 구질구질한 협박성 멘트라기에는 그가 최근에 겪어온 사건들을 고려하고 또 평소의 이미지와 상반되게 자존심이라고는 팽겨쳐 버린 태도를 봤을 때 충분히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갑자기 계훈의 상태가 호전되었고 예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냅다 떠났다. 무언가 켕기는 구석은 있었지만 어쨌든 평생 붙들고 있을 수 없다면 조금이라도 느슨할 때 도망쳐야했다. 그녀는 타인의 삶을 감당하기에 충분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자마자 예진은 한국에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휴학 신청을 하고, 편지를 쓰며 자신의 마음을 정리해보았다. 드디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날은 급하게 잡은 귀국 날까지 이틀 밖에 남지 않은 날이었다. 그녀는 민영과 지윤에게 각각 휴학 사실을 알리고 만나자는 연락을 넣었다.

 "오빠는 내가 처음이 아니지?"
 예진이 떠나던 날 계훈에게 물었었다. 예진은 속옷차림으로 책상 앞에 앉아 화장을 고치고 계훈은 퀭한 눈으로 담배를 피며 이불로 몸을 대충 가리고 있었다.
 "그러는 너는 내가 처음이 맞니?"
 계훈의 가라앉은 목소리와 차분한 대답에서 예진은 이제 떠나도 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질척대며 매달리기 위한 비굴한 거짓됨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짓됨이라는 게 이렇게 투명하게 구분되기도 하는구나 싶어 예진은 자신의 거짓말들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예진이 대답이 없자 계훈은 재차 물었다.
 "내가 네 첫-사랑이야?"
 첫 다음의 단어를 고르는 잠깐의 공백에 계훈의 진심이 담겼다. 첫 연애는 아니고 첫 경험이 맞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애초에 예진도 답이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 아니었기에 적당히 돌려준 질문인데 문득 정말로 궁금해진 것이다. 계훈 또한 자신이 예진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습관적으로 몸과 마음을 어딘가에 쑤셔 박아두기 위해 필요한 여자의 몸이 제 발로 굴러 들어오기에 꼭 붙들고 있었을 뿐. 그 과정에서 그녀의 마음까지 건드리게 되었다면 스스로를 더 미워할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예진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오빠는?"
 "당연히 처음이지. 몰랐구나?"
 "내가 모르는 게 많아. 알려줘 봐. 나랑 하고나면 좋았어?"
 계훈은 위로 마지막 연기를 뿜으며 담배를 껐다.
 "끔찍했어."
 예진은 아무 표정 없이 계훈을 잠시 쳐다봤다. 계훈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난 좋았어."
 "성의 없는 거짓말이야. 진심을 담아."
 "내가 거짓말을 잘 안 해봐서. 노력할게."
 "이번 건 좀 낫네. 오빠가 그랬지, 하다보면 나아진다고."
 계훈은 중얼거리며 이불을 동여맸다. 졸음이 밀려오니 불을 꺼달라는 몸짓이었다.
 "그래, 나아질거야."
 예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계훈은 그녀가 침대로 들어오지 않자 조금의 어색함을 느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깨고 나면 후회하겠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다고 느껴서였다. 그렇게 금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