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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4)

by 구운체리 2022. 1. 5.

14.
 "예진이한테 너무 모질게 군 거 아니야 어제?"
 "넌 아무것도 몰라."
 지윤이 운전하는 차의 보조석에 앉은 민영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
 "내가 뭘 많이 모르긴 하나봐. 예진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너도."
 "아니 예진이 걔 말이야."
 "그래 예진이. 너 걔가 나랑 똑같은 목걸이 하고 온 거 알았니?"
 "내 다이어리를 훔쳐본 것 같아."
 "역시 그랬구나. 에, 뭐라고?"
 "뭐, 목걸이? 걔가 내 여자친구도 아닌데 알게 뭐야. 그건 또 어디서 구했대?"

 민영은 다이어리를 손을 뻗으면 바로 닿는 곳에 항상 꽂아둔다. 위치를 딱 정해놓는 것은 아니지만, 양손잡이인 민영이 눈 감고 보다 편한 왼손을 뻗으면 바로 잡힐 수 있는 위치에 언제나 습관적으로 두어왔다. 예진이 민영의 방에 들러 네이선을 처음 만난 그날, 민영과 계훈이 데이트를 했던 날. 돌아와서 그 더러운 기분을 간만에 다이어리에 옮겨두려는 어쩐지 위치가 조금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 같아 예민한 탓인가 싶었는데, 네이선의 말을 들어보면 예진이 그것을 훔쳐봤다는 게 말이 됐다. 그거면 모든 찜찜함이 설명이 됐다.
 다이어리에 자세한 내용들은 적어두지 않았다. 민영은 펜으로 글을 쓰는 행동과 친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 깊게 남아있는 잔상들을 위주로 적어두었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피를 닦고 있는 사라진 언니가 가끔씩 소복을 입고 귀신처럼 나타날 때의 모양이 꼭 초고추장을 찍어둔 광어지느러미 같다던가, 왼손잡이인 그녀를 교정하겠답시고 아버지가 하도 소리를 질러서 그 소리가 오른쪽 고막을 뚫고 왼쪽 고막으로 나오는 줄 알았는데 그때 마치 뇌가 180도 돌아간 것처럼 세상이 반대로 돌아가 갑자기 오른손을 잘 쓰게 되었다던지.
 예진은 오빠가 맞아서 흘린 피를 스스로 닦은 적이 있다고 했고 아버지가 워낙 독불장군이라 말이 통하지 않고 가족들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반항하는 의미로 팔뚝을 한번 그었다가 도리어 호되게 얻어맞았지만 그때 이후로는 부모님이 '착해졌다고' 했다.
 마음에 병이 없는 어른은 결코 아이에게 의도적인 상처를 물려주지 않는다. 마음이 병든 어른은 아이의 몸짓 한두 번으로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자식에게 한 번도 매를 들지 않는 부모는 있어도 한 번만 매를 드는 부모는 없는 것이다. 깊어보이지도 심각해보이지도 않는 그런 퍼포먼스 한번에 '착해질' 수 있는 부모는 존재할 수 없었다. 본인에 대해서나 부모에 대해서나 예진이 무언가를 더 감추고 있는 것이라고 민영은 생각했었다.
 그런 가족이 예진의 한국행 날짜에 맞춰 개인 휴가까지 희생해가며 한데 모이려고 애쓰는 모양이 영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관심도 없던 아버지가 자신에게 연락을 한 것을 떠올리고는 뭐 그럴만한 사연이 있는 집안이겠거니 했다. 민영의 인지범위에서는 견적이 나오지 않는 스케일의 이야기가 있겠지. 대충 보기에도 부잣집이니까 사는 모양도 다를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민영은 스스로가 자신의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냄새가 나는 남자가 있으면 얼마나 진절머리를 치는지 알기 때문에 예진이 계훈과 어울린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녀를 동정했다. 트라우마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피해자들이 그대로 그 비슷한 가해자를 찾아가 유사한 관계를 형성하고 익숙함을 안정감으로 착각하는 일들을 종종 봤기 때문에 민영은 예진과 따로 깊은 얘기를 하며 곁을 지켜주어서라도 그녀를 올바르게 꺼내주고 싶었다. 강제로 떼어내려 했다가는 오히려 모든 연락을 끊고 둘이서만 숨어버리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민영은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그렇게 잃었고, 그 이후로 거리 두는 법을 조금 배웠다.
 하지만 이전에 보았던 흉터의 흔적조차 없는 예진의 깨끗한 팔과 그녀가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모든 것이 거짓임을 깨달았고, 예진을 안타깝게 여겼던 자신의 고민들이 전부 모욕당하는 기분을 느꼈었다.

 "그래서 언제 거짓말이라고 확신한거야?"
 지윤은 물었다. 둘은 바다가 보이는 어느 주차장에 잠시 차를 대고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저 목적지 없이 차를 몰아 캘리포니아 1번 국도를 달려보자는 것이 계획이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머리를 비워야했기에.
 “걔가 그날 말한 모든 문장들이 거짓말이었어. 느껴지더라고.”
 “강계훈이랑 만난다는 것부터?”
 “아 그거 하나는 맞겠다. 사랑은 아니겠지만. 뭐랬더라, 바빠서 우리한테 연락을 못했다는 거나, 대화가 잘 통했다는 거나, 외로워서 연락해봤다는 거나.”
 “와 그게 다 거짓말이었어?”
 “강계훈이랑 대화가 통한다는 게 말이 되니?”
 “난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아닌가? 내가 잘못했나봐, 그냥 여기서 빠져죽을게.”
 지윤은 일부러라도 감정을 뱉어내려는 듯 크게 웃었다. 민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굳이 자세히 듣지 않아도 지윤 또한 알고 있었고,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을 민영 또한 알고 있었다. 태평양은 깊고 하늘은 높았다. 지윤이 민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외로워서 연락한 게 아니면 뭘까?"
 "괴로워서겠지. 온통 구라로 사는 게."
 "대충 라임부터 맞추고 뒤에 그럴싸하게 끼워 맞춘 거 아니지?"
 "좀 괜찮았나. 찢었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좋은 시도였어."
 "노력할게."
 "그래. 노력해야지. 우리 다."
 이번엔 민영이 지윤을 바라봤지만 지윤은 차에 기댄 채 썬글라스 너머로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콧잔등을 잠깐 찡그렸다.
 가만히 바라보던 민영이 갑자기 웃옷을 벗고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속옷 노출에 놀란 지윤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민영은 호쾌하게 웃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자유를 너도 느껴보라고 부추겼지만 지윤은 대신 놀려가며 그녀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담겼다. 비키니에 가까운 차림의 민영과 그녀의 팔뚝에 선명한 흉터자국, 그리고 흔들리는 바다와 쭉 뻗은 햇살까지. 은빛 선은 벌어진 민영의 입속으로 이어지는 듯 보였다.
 아름다웠다.

 도합 천킬로미터가 넘는 캘리포니아 1번 국도는 미국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대충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해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너머까지 이어져있다. 평균 40마일 정도의 속도로 달리면 편도로 완주 하는데에 꼬박 하루 정도가 걸린다. 남는 시간에는 잠도 자야하니까. 물론 기름이 부족해서 안 되겠지만. 하지만 두 친구는 굳이 그 길을 구석구석 봐두지 않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한 시간도 채 달리지 않고 벌써부터 지쳐있었다. 찾아둔 드라이브용 팝송 플레이리스트가 끝나버린 것이다.
 지윤의 고집으로 꾸역꾸역 두 시간을 내려가고 나서야 중간에 어디라도 들려서 배라도 채울만한 포인트가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차를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려서 듣던 한국노래를 틀고 함께 따라 불렀다. 한국에서는 노래방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막상 미국에 오니 값이 너무 비싸 노래에 대한 괜한 갈증이 생겼었나보다. 집에 도착해 전화를 하려다 서로의 목이 쉰 것을 확인하고 둘은 깔깔대며 전화를 끊었다.
 "멋진 하루를 보냈나봐 레이첼." 네이선이 웃으며 인사했다.
 "굉장한 방학이었지." 민영은 대답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서툰 발음에 제대로 듣지는 못했겠지만, 네이선은 알아들었다. 소통에 언어가 필수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