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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2)

by 구운체리 2021. 12. 31.

12.
 예진이 돌아왔을 때 교내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자신이 잠깐 없는 사이 계훈이 사라지고 지윤과 민영이 그만큼 더 가까워져 있었다. 민영은 살을 빼겠다며 지윤이 짜놓은 말도 안 되는 극기훈련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고, 한국인 친구들의 모임에서도 더 이상 그 둘이 겉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없이도 어쩌면 세상은 더 잘 돌아가는 걸까, 예진은 괜한 심술이 나고 외로워졌다.
 둘과 달리 예진은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는 창구가 많았다. 예진 또한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들을 그만큼 흘리고 다니기도 했지만. 계훈에 대한 이야기는 원래도 조금 알고 있었기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결국 지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예진은 그녀의 선물을 지윤이 열어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렸다는 데에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윤의 잘못이 아니고 고의가 아니며 지윤 또한 그만큼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갈수록 확신이 없었다. 떨어져있는 동안 연락도 잘 되지 않았고, 그만큼의 표현도 받지 못했다. 작별인사로 건넨 볼 키스에 지윤이 적절한 리액션으로 응답해주지 않은 순간부터 선물을 잃어버리는 일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예진은 표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돌아오는 길에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주시던 아버지의 표정도 어딘가 말을 삼키는 듯한 떨떠름함이 있었다. 난 이렇게 충실하게 내 감정을 표현하는데 왜 그만큼 보답 받지 못하는 걸까. 모든 인간관계가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남은 방학 기간 동안 예진은 참석해야 할 모임이 많았고 민영은 지윤과 함께 체대생의 길을 걷고 있었으므로 셋이 함께 모일 시간을 잡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했다. 예진은 내심 지윤이 먼저 연락해주기를 기다렸지만 돌아온 지 3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자 토라진 채로 전화를 걸었다. 민영이 들어올 때와 달리 예진이 들어오는 날 하필 지윤의 생리통이 심하게 도져 배웅을 나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운전을 할 줄 모르는 민영은 태워다 줄 것도 아니면 굳이 마중을 나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 정말 섭섭해.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수 없는 거야?"
 예진은 되도록 토라진 마음을 티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윤은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그녀를 달래줘야 함을 눈치채고 있었다. 예진의 억지 밝음은 끝에 가서 결국 무너졌다. 계훈과 있었던 일을 지윤이 얼버무리고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이 아니라 민영에게 어떤 실수를 했는데, 이전에 했던 잘못들도 있고 해서 그와의 연을 끊었고 앞으로 볼 일이 없으니 더 이상 그에 대한 얘기를 퍼뜨리지 않겠다고 했다. 예진은 결국 눈물이 터졌고 소리를 감추려고 했지만 지윤은 물기 먹먹한 숨소리를 들었는지 당황해하면서도 달래주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어. 계훈이는 이미 나쁜 놈이지만 그렇다고 그 친구를 더 망칠 수는 없어. 미안해. 이해해줘 예진아."
 "난, 난 너에게 중요하지 않은거야?"
 예진은 숨을 고르고 말을 골랐지만 단어를 뱉을수록 설움이 복받쳐 더 이상 전화를 할 수 없었다. 계훈의 비밀을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외로움과 서러움과 알게 모르게 조금씩 쌓여있던 우울함이 겹쳐 스스로도 자기의 마음을 알 수 없을만큼 복잡해져 모든 게 싫어졌다.
 지윤은 지윤대로 심경이 복잡했다. 계훈의 사건에 대해 함구하는 것은 그가 돌아오는 것을 억제하는 장치이자 그전까지 그와의 우정에 대한 예의였다. 예진의 요구는 터무니없이 어린아이 같았고 갑자기 울어버리며 전화를 끊자 당황스러움과 함께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최근 일어난 일들에 의한 심리적 불편함과 신체적 불편함 등등이 겹쳐 그녀의 응석을 받아줄 여유가 없는 것도 있었다. 스스로 털고 일어나지 않는 한 먼저 달래줄 방법이 없겠노라고 생각했다.
 '난 너에게 중요하지 않아?'
 지윤은 고민했다. 예진이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존재일까. 문득 민영과 예진의 팔목에 대해 이야기하다 완전히 까먹은 일이 생각나 민영에게 전화를 했다.

 "... 공주님이잖아. 너가 너무 소홀했어. 그냥 얘기해주자."
 민영은 예진의 가려운 곳을 가장 잘 파악했다. 특히 체력이 약한 예진은 한국 여행과 시차 적응으로 지쳐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계훈의 이야기는 그냥 마지막 트리거이고 원체 과묵하고 무뚝뚝한 지윤이 잘 챙겨주지 않아서 삐진 것이다. 특히 자신이 운동한다고 최근에 지윤이랑 좀 붙어 다녔으니까. 강계훈 얘기도 이미 알 사람들은 아는데 굳이 숨길 것은 뭐람, 지윤은 꽤나 고지식한 구석이 있었다. 민영은 지윤 만큼 계훈을 존중하지 않았기에 그의 수많은 만행에 결정타 하나가 얹어진다고 달라질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들의 베프 예진에게라면 더더욱.
 "하, 예진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인데 가끔 조금 힘들다. 내가 애인도 아니고 말이야. 남의 안 좋은 얘기 자꾸 꺼내서 뭐하니."
 "그래요 도덕선생님, 그런 더러운 일은 제가 맡아야죠."
 "뭐래. 너가 예진이 좀 달래줘. 크리스 얘기는 자세히 하지 말고."
 "아 예. 내가 보기엔 예진이 걔도 운동을 해야 돼. 이게 다 몸이 약해서 정신이 약한 거야."
 "요새 넌 좀 도움이 되나봐?"
 "말도 마, 근데 어째 살이 더 찐 것 같지?"
 "얘기했잖아 체중은 식이조절이 전부라고..."
 "네, 체육쌤, 저 생리 땜에 조퇴 좀 할게요."
 "생리대 제출하고 가라."
 "진짜 미친새끼였어 그때 그 새끼는. 암튼 집도 가까우니까 내가 예진이 찾아가볼게."
 "그래, 수고."
 둘은 민영이 종종 씹곤 하는 고등학교 체육 선생을 농담거리 삼아 낄낄대고 대화를 마무리하며 통화를 끝냈다. 지윤은 자신이 예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문득 느꼈다. 민영과 과거에 대해 그런 얘기를 나누었다는 사실도 몰랐고, 가정 내에 그런 트러블이 있는 줄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예진의 일방적인 관심에 자신이 응해주지 않아 지친 것일까, 지윤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굳이 먼저 알려고 하지 않는 행동을 예의라고 생각했지만 예진 같은 친구에게는 거리감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어 인간관계가 참 어렵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예진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어두운 얘기를 꺼낼 자신은 없었다. 무언가 예진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은 감성의 이야기 같은데, 예진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서 자신에게 그런 깊은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일까. 사람은 겉만 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러니까 지윤이가 너는 데리러 와 준거네? 내가 뽀뽀했단 얘기도 너한테는 하고. 내 팔목 얘기도 하려고 했구나?" 민영은 이야기가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보통 이런 엿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지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예진이 직접적인 위로를 필요로 한다기에 직접 찾아가 무방비하게 많은 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 문제였다. 녹음본도 들려주고 그날 있었던 일도 차례대로 들려주고 지윤과 나눈 메신저 내역도 보여줬다. 보여줘서 안 되는 내용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예진의 예민해진 감성을 건드릴 수 있는 것들이 있는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애초에 많은 생각을 하고 사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달려나가서 차에 치이고 싶었다. 강계훈이 갑자기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한번 하자고 난리라도 피워주면 당장에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찰은 부르겠지만.
 "지윤이가 계훈 선배는 참 아끼는구나."
 어쨌든 예진은 차분해져 있었다. 기분이 안 좋은 쪽으로 차분해진 것이 문제였지만, 사람이 진정이 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생각을 할 거고, 그러면 다 해결이 되리라 믿었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민영은 괜한 말을 덧붙였다.
 "지윤이가 너도 아끼거든. 참 좋아하는 친구라고 했어."
 "데려다준 게 고마워서 직접 만든 쿠키랑 편지를 준비했는데, 열어보지도 않았어."
 "어... 그렇구나. 난 아무것도 안 줬는데."
 "너한테는 밥도 사줬고."
 "아... 닥칠게 그냥."
 "비참해. 혼자있게 해줘. 와줘서 고마워. 알려줘서 고마워. 잘 가."
 "그게... 그래, 내일 연락하자. 잘 자."
 민영은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지윤에게는 일이 단단히 꼬였음을 알리기 위해 '미안해 날 죽여줘ㅠㅠ'를 화면 가득 복사해서 보내고 심란한 표정으로 방에 돌아오니 네이선이 인사를 했다. "어 네이선! 잠깐 시간 돼?"

 네이선의 충고와 위로를 듣고 방에 들어온 민영은 어쩐지 혼난 기분이지만 오히려 마음이 풀린 듯 했다. 그 난장판에서 가장 피해를 본 사람이라 그녀의 넋두리에 공감할 줄 알았는데 지윤과 마찬가지로 계훈을 두둔했다. 듣고 보니 자신만이 철 들지 못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친구들을 보살피는 섬세함과 인애로운 마음씨에 대한 칭찬을 들었다. 칭찬 자체도 오랜만인 것 같지만 다른 성취가 아니라 인간됨에 대한 것은 정말로 들어본지가 까마득해 민영은 기분이 좋아졌고 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관심받고 싶어서 날뛰는 망아지, 가짜 광기의 광대 정도로 취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라며 덧붙인 마지막 말에 마음이 쓰였다.
 "그 친구, 저번에 처음 데려왔을 때 네 방에서 뭔가를 뒤적이고 있더라. 비밀스러운 실수라도 한 사람처럼 살금살금 기어나가길래 귀엽다고 생각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