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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6)

by 구운체리 2022. 1. 10.

16.
 미적분 대회 이틀 전. 타이머를 켜놓고 수시로 확인하며 미적분을 풀다 미리보기로 뜬 예진의 메세지 내용에 민영은 화들짝 놀라 육성으로 욕을 하며 핸드폰을 밀쳤다.
 "뭐야 씨발!"
 네이선은 진지하게 집중하라고 그녀를 혼내려 했지만 민영은 고장 난 듯 잠시 가만히 있었고 무언가 생각하더니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네이선이 채점을 하는 동안 메세지를 읽지 않고 지윤에게 전화를 해보았는데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내일이 시합 날이라 폐관 수련을 한다더니 핸드폰을 아주 꺼놓고 일찍 잠에 든 모양이었다. 괜히 켜뒀다가 새벽에 오는 전화에 깬 적이 몇 번 있다며. 네이선은 평소보다 많이 저조한 그녀의 성적에 대해 훈계를 늘어놓다가 민영의 정신이 다른데 가 있는 것을 보고 사정을 물었다.
 "뭐야, 심각한 일이야?"
 "네이선, 예진이 기억나지, 내 방 다이어리, 시드니. 휴학하고 한국을 간대."
 "너가 실망했다는 그 친구. 너의 베스트프렌드."
 "더 이상 베스트프렌드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관계는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아. 시험 끝나고 얘기해보는 건 어때?"
 "출국이 모레라는데."
 네이선은 골치 아프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는 자신보다도 민영의 미적분 성적에 진심이었고 그럴때마다 민영은 어리둥절했다.
 "우리 정말 열심히 준비했잖아. 너의 미적분은 나에게 정말 큰 의미가 있어."
 "알아. 그냥 전화로 얘기할까봐."
 "무슨 소리야! 지금 당장 만나고 와야지! 지금까지 준비한 걸로 충분하니까, 마음 불편할 일 만들지 말고 어서 다녀와!"
 "진정해 친구, 지금 보자고 연락이 온 건 아니야. 하지만 물어볼게."
 언제나 현명했던 네이선이기에 충고를 따르기는 하겠다만 지금 그것이 그녀들의 우정을 지키기 위함인지 자신의 대회 욕심을 채우기 위함인지 민영은 아리송했다. 어쨌든 그녀 본인도 예진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렇게 선명하게도 괘씸하고 분했던 감정의 조각들이 막상 찾으려니 보이지 않았다. 정작 최근 들어 예진을 찾은 적은 없지만 막상 사라진다고 하니 마음이 아리고 자신과의 갈등 때문인 것 같아 불편했다. 다이어리 훔쳐본 건 여전히 기분이 나쁘지만 예진이니까 한 번은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윤도 없이 단둘이 보는 건 영 어색했다.
 "네이선, 같이 가줄래?"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그건 너의 일이잖아."
 냉정한 놈, 기대도 안했다. 하지만 맞는 말이다, 나의 일이지.

 핸드폰 알람에만 의존하다 자명종이라는 아날로그 문물을 깜박한 지윤은 일찍 잠들었음에도 누적된 피로 탓에 빠듯한 시간에 일어나 부랴부랴 대회장으로 달렸다. 철저하게 실력으로 뽑는 소수 정예 동아리인데다 서양 애들 특유의 타고난 신체조건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아 지윤은 무척 긴장해있었다. 취미로 하는 운동 경기에 이렇게까지 안달복달하는 스스로가 신기했지만, 그래서 재미있었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충만했다. 그 시각 예진은 민영의 답장을 받고 지윤은 아직 읽지도 않았음을 확인한 뒤 민영에게 언제 어디서 만나자는 답장을 보냈다.
 예상 외로 경쟁률이 높지 않은 대신 덩치들이 전부 컸다. 지난봄에 거둔 여성부 준우승과 혼성부 우승으로 제법 자신감이 붙어있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전교 단위에 테니스치는 아시안은 자신 밖에 없는 건가 싶었다. 인도에서 온 듯한 선수가 있었지만 키가 180은 되어보였다. 지윤은 163으로 아주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틈바구니에 끼어있으니 고등학교 언니들 구경 온 중학생 꼬꼬마같이 느껴졌다. 지윤보다 작은 선수는 한 명 뿐이었는데, 밖에서 만났다면 훈련된 특수요원이라고 생각할만큼 인상이 강렬하고 몸이 딴딴해 보였다.
 적게는 세 명에서 최대 여섯 명까지 정회원으로 뽑는다고 했고, 합쳐서 열 두명까지는 준회원의 자격을 준다고 했다. 정회원과 준회원의 차이가 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열두 명 안에만 들어가면 동아리 멤버로 함께 운동은 할 수 있는 듯 보였다. 어차피 프로 데뷔할 것도 아니고 준회원만 되면 됐다. 중간에 잘리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지원자가 스물 한 명이니까, 대충 두 명만 이기면 안정권이겠지.
 세 명씩 일곱 조로 나뉘어 단식 풀-리그로 예선을 통해 열네 명을 본선에 올린다. 심사위원들의 판단으로 탈락자 중 두 명을 선택해 열여섯 명이 토너먼트로 본선을 치른다. 대진표는 심사위원들이 정하며, 패자 중의 패자전을 거쳐 네 명을 마저 탈락시키고 승자들끼리는 토너먼트를 마저 진행하여 정회원의 자격을 가린다. 즉, 예선에서 만나는 두 명 중 한 명만 이기면 높은 확률로 본선에 진출하고, 거기서 한 경기만 이기면 준회원이다. 이렇게 계산이 되자 지윤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선수 등록을 하고 조 추첨을 진행하는 사이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 전원도 안 켜고 있었다니. 그제야 예진과 민영에게서 메세지와 전화가 와있었음을 확인했지만,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겨를은 없었다. 급한 일은 아니겠지.
 지윤은 특전사와 가장 키가 큰 캐나다에서 온 공대생과 함께 C조가 되었다. 최장신과 최단신 둘이 배정된지라 모두들 결과를 궁금해 했다. 지나가다 구경 온 학과장 교수도 지윤에게 다가와 응원을 건네더니 특전사 친구에게도 인사를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예선에서 붙었다며 익살스럽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지윤은 더더욱 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올림픽 선수마냥 극기 훈련을 견뎌냈는지. 미국은 대학 스포츠 문화가 옛날의 우리나라처럼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보다. 키가 큰 친구는 긴 사거리에도 불구하고 순발력이 너무 느려 급격한 방향전환에 대응하지 못했고 특전사 친구는 힘이 세고 체력이 좋았지만 테니스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서브 실수만 다섯 번을 넘게 했고, 배드민턴과 룰을 착각해 잘못된 영역에 공을 보내고 실점한 줄도 몰라 멍을 때렸다. 상대들이 약한 것도 고려는 되었지만 지윤은 무난하게 1번 시드를 배정받고 본선에 진출했다. 특전사는 키다리를 꺾고 3번 시드로 본선에 들어왔다. 키다리는 예선 탈락자 다섯 중 하나가 되어 점심도 되기 전에 경기장을 떠났다.
 동아리에서 본선 진출자들에게 점심을 제공했고 본선을 진행하기 전까지 남는 시간 동안 동아리 부원들이 찾아와 자기들끼리 게임을 하거나 지원자들 중 일부를 지목해 단식 혹은 복식 랠리를 진행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다는 건 매우 잘하거나 매우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지윤에게도 어느 중국인이 다가와 게임을 청했다. 그래서 지윤은 중간에도 핸드폰을 확인할 수 없었다.
 지윤은 중국인을 상대하며 벽 같은 것을 느꼈다. 아 이게 테니스구나. 열심히 준비를 한 것이 헛되지는 않은 게 그녀가 예상했던 한계까지 몸의 기능을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겨우 한두 포인트 득점을 올린 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점심도 거르고 게임을 계속하자 지도교수로 보이는 누군가가 와서 화를 내며 중국인을 끌고 갔다. 지원자 체력을 그렇게 빼놓으면 어떡하냐며. 그녀는 다른 동아리원이 쥐어준 바나나를 억지로 베어 물며 차례를 기다렸다. 16강의 마지막 경기에서 뛸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덕에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리며 그사이 찍혀있는 부재중 알림을 확인했다. 민영이었다. 얘 답지 않게 재촉을? 어제부터 왜 찾는 걸까. 그제야 지윤은 메세지를 확인했다. 바로 민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바로 받지는 않았다. 이 친구도 요새 무슨 대회인지 준비한다고 걸핏하면 핸드폰이 꺼져있고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예진이 출국한다고? 내일?
 거짓말처럼 지윤은 16강 경기에서 패배했고 운영진은 충격에 빠진 듯 보였다. 강력한 우승후보이자 무조건 정회원으로 포섭하려던 친구가 프로 팀 입단 제의까지 받았던 유소년 선수 출신 회원에게 영혼까지 빨린 뒤 빛처럼 탈락해버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형평성의 문제가 있어 지윤이 남은 경기를 어떻게 소화하더라도 그녀를 정회원으로 뽑아줄 방법이 없었다. 정작 지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조건이었겠지만, 정회원 승급을 위해서는 제법 귀찮을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기에 준회원 중에는 중도에 탈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윤은 심란한 마음에 집중을 못해 쉬운 상대에게 지고 말았다. 4번 시드라고 만만하게 봤지만 타고난 체격이 좋은 선수라 집중해서 상대했어야 했다.
 패자부활전에서는 180의 인도인 친구를 만났고, 이번엔 방심하지 않고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이겨 준회원의 자격을 얻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 게, 메인이벤트인 결승전이 당연하게도 마지막 순서라 그녀는 입부를 빠르게 확정짓고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입부와 성실한 활동 의사를 분명히 밝혔는데도 동아리 사람들이 자꾸만 귀찮게 굴며 그녀를 붙들어두려고 해 나중에는 짜증마저 났다. 내가 16강 게임을 거지같이 해서 졌는데 뭘 자꾸 따로 불러내서 사과를 하고 정회원이 어쩌고 하는 약속을 하고 그러는지.
 아 알겠다구요, 좋다구요.
 그렇게 급한 일이 있다고 양해를 구하고 먼저 벗어나는데 30분이 걸렸다. 민영과 예진이 만나기로 했다는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 정도가 지났으니 지금 달려가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화를 해보니 바로 받았다.
 '아 우리 십분 전에 헤어졌어.'
 '뭐야, 왜 그렇게 빨리?'
 '행정처리 할 것도 있고 인사할 사람들도 더 있대.'
 '어떡하니, 나 지금 시합 끝나서 연락을 계속 제대로 못 봤다. 예진이 답장도 제대로 못해주고. 오늘 보자니까 얘는 왜 답장이 없어 또.'
 '예진이가 혹시 못 만나게 되면 너 주라고 편지 전해주고 갔어. 지금 갈게 어디야?'
 '그래 만나서 물어볼게, 나 지금 체육관 앞인데 안 씻고 바로 간다. 사람 없는 데가 좋겠지, 박물관 앞에서 볼까?'
 '좋아, 십 분 정도 걸릴 듯.'
 '난 오 분. 기다릴게.'
 '천천히 와.'
 예진은 바쁜지 지윤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민영은 대회 준비 때문에 룸메이트와 약속이 있다며 편지만 전해주고는 금방 사라졌다. 대회 시간과 예진의 출국 시간이 겹쳐 배웅 나갈 수가 없다는 말과 함께. 둘이 어느 정도 화해를 한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고, 민영이 무슨 대회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 번 물어봤는데 부끄러워하며 대답을 피하길래 캐묻지 않았는데, 나름 중요한 것이었나보다.
 지윤은 편지를 열어 기숙사를 향해 걸으며 읽어보았다. 한 번 끝까지 읽고 난 뒤 지윤은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고 방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머리를 묶고 책상에 앉아 다시 봉투를 꺼냈다. 편지를 열고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지윤은 가만히 앉아 고민을 하다 외장하드를 꺼냈다. 그녀의 소중한 것들과 유언장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밤이 되자 예진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지윤아, 편지 읽어봤어?]
 지윤은 바로 전화를 걸까하다 멈칫하고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내일 비행기 시간은 알려줘야지. 가기 전에 안 보려고 했어?]
[민영이한테는 얘기했는데. 나 다시 돌아올 거야. 그때도 다시 친구해줘.]
 지윤은 친구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예진의 메세지가 이어졌다.
[고마워. 사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