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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편 연재/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Part 1. (일상, 관계)

6월의 장미, 캘리포니아 1부 - (17, X) 完

by 구운체리 2022. 1. 12.

17.
 지윤은 무작정 공항에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어떻게든 얼굴을 봐두지 않으면 영영 제대로 거두지 못한 관계로 남을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함이 그녀를 움직였다. 예진도 민영도 연락이 되지 않아 비행기 시간을 알 수가 없어 가장 이른 비행기 편의 시간에 맞춰 새벽부터 가 있어야 했다. 다행히 하루에 샌프란시스코공항과 인천공항을 잇는 노선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예진이 경유하는 노선을 택했을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비행기 두 대를 보내고도 예진을 마주치지 못해 초조하던 참에 마침 민영에게 전화가 왔다.
 "나 6등했다! 미쳤지않니? 네이선은 등수에도 못 들었는데 내가 6등했다고 지금 엄청 신났어!“
 옆에서는 시끄러운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민영의 그렇게 신난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무슨 시합을 둘이 같이 준비했는지는 모르지만 잘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예진의 비행편을 알아봐야했다.
 "어? 지금 출발하면 늦을텐데, 아마 지금쯤 도착했을걸? 대한항공이야! 한 시간 뒤에 출발하는 거."
 "그래 뭔지 모르지만 축하하고, 나중에 얘기하자!"
 지윤은 예진이 아직 수하물을 보내지 않았기를 바라며 공항을 헤집고 다녔다. 짐이 있는 한 해당하는 항공사의 수하물센터를 무조건 거칠 것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가만히 있었으면 됐지만, 지윤은 정신이 없기도 했고 항공사를 잘못 찍은 탓에 엉뚱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예진이 어느 항공사 마일리지를 모으고 있었는 지라도 알아둘걸 그랬나. 지윤은 안내방송이라도 할까, 항공사 창구에 가서 물어볼까 하다가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공항 입구에서 기다렸다. 이미 지나쳤다면 글러먹었고 아직 오는 중이라면 분명 여기서 내릴 테니까. 지윤은 너무도 피곤한 나머지 길바닥에 대충 주저앉았다.

 예진은 멀리서부터 입구를 지키기라도 하는 듯한 자세로 주저앉아있는 자그마한 동양인 여자아이를 본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우버 기사가 3번 게이트에 도착했다고 알리며 비상등을 켜려고 하자 예진은 다급하게 조금만 앞으로 가서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대한항공은 3번이야, 시드니."
 "고마워, 나도 잘 알고 있는데 6번까지만 가줘. 들를 곳이 있어."
 "문제없지."
 예진은 지윤이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곁눈질하며 공항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마일리지 혜택으로 줄을 서지 않고 짐을 부친 그녀는 곧장 보안검색대를 지나치려다 문득 두고 온 것이 생각난 것처럼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지윤은 그곳에 없었다. 예진은 무엇을 찾으러 나왔는지 잊어버린 사람처럼 황망히 다시 공항으로 들어가려 했다.
 예진은 멍하게 숨을 고르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예진이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를 꼭 껴안으며 뒷통수를 감싸안았다. 예진은 그대로 품에 안겨 허리를 감쌌다.
 둘은 오랫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X.
 식순이 끝나고 남은 식사를 하는 동안 부부와 양가 부모들이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서로의 손님을 소개하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신혼 무리가 그들의 테이블에 왔을 때 예진이 나를 알아봐 홀로 덩그러니 앉아있는 이방인으로써의 정체성이 까발려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고, 한편으론 예진 양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난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나 현타가 올 것도 같았다.
 하지만 예진 양은 기억력이 좋았다. 같은 테이블에 따로 앉아있던 나를 친한 친구의 전 애인이 아닌 다른 호칭으로 식구들에게 소개해주었다. 우리가 예전에 함께 만났을 때 예진 양이 나를 부르던 애칭인 ‘유월의 장미’라고.
 졸지에 장미가 되어 그녀의 친구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나는 식이 전부 끝나고 돌아갈 때에도 한아름 식에 쓰였던 장미 다발을 떠안고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조금 여유가 생긴 예진 양이 뜻밖에도 따로 감사인사를 하러 나를 찾아와 준 것이다. 일찍 도착하지 못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 아쉬웠는데 나로써도 다행인 일이었다.
 “찾으시는 사람은 오지 않으셨나봐요?”
 “그러게요, 아쉽네요. 와줄 줄 알았는데. 축하드려요, 신랑 분이 멋지시네요.”
 “고마워요. 와주실 줄 알았어요. 따로 챙겨드릴 게 없어서 어쩌지, 이 꽃이라도 가져가주세요. 너무 예뻐서 꼭 쓰자고 제가 손수 고른 아이들이에요.”
 “별말씀을요. 정말 예쁜 장미네요.”
 “아직도 그 시는 외우시죠? 암송해주셨다고 들었을 때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잊으려한다고 어디 잊혀지나요. 그러니 제가 여기에 있죠.”
 “정말 그래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나중에 꼭 다시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행복하게 사세요.”
 품에 가득 샛노란 장미를 안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그녀가 좋아하던 이해인 수녀의 시 구절을 되새겨 보았다. 삶의 길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낼 수 있다고. 그래서인지 그녀가 준 장미에는 가시가 전부 정성스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그녀를 떠올렸다. 분명 축복과 축하의 자리에 다녀왔는데, 어쩐지 보이지 않는 가시에 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노란 장미의 꽃말이 질투인 것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으려나 곱씹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