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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드라마, 관계)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O)

by 구운체리 2022. 1. 24.

O.
 “정직한 정치인. 과거에 떳떳한 정치인. 자신의 과오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뉘우치고, 바로잡을 줄 아는 정치인. 바로 저, 고정욱입니다. 여러분,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생각하시고 피눈물 흘리시면서 나쁜 놈들, 아주 못된 잘못을 저지르고 뉘우치지도 않는 그런 놈들한테 표를 주셨죠. 그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아시잖아요, 그런 질 나쁜 놈들이 여러분들을 대표하면 안 된다는거.
 하지만 그게 어디 여러분 잘못입니까. 뽑을만한 사람이 없었던 우리 정치판이 문제였죠. 자, 제가 바로잡겠습니다. 저 경기도의 아들, 동흥의 자랑, 고정욱.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여러분 앞에 발가벗겨진 마음으로 섰습니다.
 답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 올바른 사람이 마땅한 자리에 서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을 위해 태어나고 준비해 온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한 표, 더 이상 범죄자들에게 낭비하지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나타났습니다.”

 “승준 엄마, 들었지?” 규민은 정욱의 연설이 끝나자 박수를 쳤다. 정미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연설에 마음이 동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역구 의원이 아는 사람이면 콩고물이 뭐라도 떨어지지 않겠나 막연하게 기대할 뿐이었다. 정미가 보기에 정욱도 고만고만한 정치인들 중 하나였지만, 규민은 정욱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승준아, 아버지 고등학교 동창이다. 아주 훌륭한 분이지.”
 승준은 정욱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규민은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도 마음껏 보지 못하고 눈치를 보아야했던 자신의 어린시절을 돌이켜보며, 승준이 너무 진보한 기술의 시대에 태어나 버릇이 잘못 들었다고 한탄을 했다. “여보, 승준이 요새는 학교 씩씩하게 잘 다니지?”
 “요즘은 힘들다는 말도 잘 안 하는걸요. 당신 말대로 태권도 학원도 열심히 다니고 웅변 학원도 다니고 있으니까 나아지겠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곧 중학교를 졸업하는 승준은 태권도나 웅변 학원에서 자신감을 기르기에는 조금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대신 본인이 원하는 재즈피아노와 코딩 학원을 다니고 있으니 나아질거라는 기대만큼은 헛되지 않았다. 그러기를 기대했다.
 승준은 중학교 생활 내내 적응에 어려움을 보이며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정미는 남자 형제가 없이 여중 여고를 나왔기에 아는 바가 잘 없었고, 남편인 규민은 그 나이대에 비슷한 어려움을 극복한 본인의 사례를 바탕으로 몇가지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시대가 급변한 것에 맞추어 아이가 절충적인 대안을 제시했을때 정미는 내심 대견하게 생각했지만 규민은 자신의 조언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해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정미는 지혜롭게 둘 사이의 분쟁을 조정했다. 요새는 컴퓨터 언어능력이 국어능력보다 쓸모가 좋으니 코딩이나 웅변이나 비슷한 역할이지 않겠나. 태권도나 피아노나 같은 예체능 계열에 속하니 역시 비슷하지 않겠나. 정미는 그렇게 아들과 스스로를 설득하며, 거짓말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그렇지, 저 놈도 나처럼 듬직한 남자가 될 거야. 사람은 정직한 게 제일 중요해. 암.” 규민은 그윽하게 정미를 바라봤지만 정미는 애써 무시했다. 왜소한 체구에 이제는 배도 나오기 시작한 남편을 쳐다보았다 웃음이 얼굴에 번지면 속마음을 들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정미는 그런 규민의 허세를 귀엽게 여겼고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듬직한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 저 친구, 정욱이 덕분이지. 우리 승준이도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할텐데.”

 “여우같은 새끼, 쇼를 하네.” 장군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티비를 껐다. “보지도 않는 티비는 괜히 틀어놓고 그래 밥맛 떨어지게.”
 “야, 애 앞에서 욕하지 말랬지.” 현아는 놀란 눈의 효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군을 쏘아봤다. “괜찮아, 아빠가 효진이한테 화낸 거 아니야.”
 “화면에 지지 묻어서 놀라서 그랬어요, 아빠가 미안해요. 우리 효진이 저런 나쁜거 보지말고 이쁜 것만 봐야지요.” 장군은 울먹이기 직전인 효진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억지로 얼굴을 구겨가며 우스운 표정을 짓는다고 애썼지만, 미적 감각에 대한 본능이 무척 솔직한 나이의 아가를 상대로는 역효과였던 것 같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 효진을 현아가 안아서 달래기 시작했고 장군은 튀어나온 이유식이 묻은 부분의 반찬들과 함께 남은 밥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오늘도 훌륭한 쇼맨십이었습니다, 후보님. 저번에 말씀드린 천양, 저희 쪽 사람이 만나보고 왔다고 하는데, 경과보고 받아보시겠습니까?”
 “고마워요. 천양이라, 그게 누군지 저는 모르는 사람인 것 같은데, 중요한 일 아니면 믿고 맡긴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아 천양은 그 동흥고 동창이라는… 앗!” 짐을 들고있던 막내 수행원이 끼어들어 보충 설명을 하려는데 실장이 뒷꿈치로 조용히 발을 즈려밟았다. 정욱이 미간을 찌푸리자 실장이 재빠르게 말을 마무리지었다.
 “아 역시, 훌륭하신 말씀이십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보님이 중요한 일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정욱은 잠시 의미심장하게 막내 수행원을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