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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드라마, 관계)

연극이 끝난 후 (Play for me) - (N)

by 구운체리 2022. 1. 31.

N.
 “대동흥 21기, 부동의 부흥을 위하여! 여기 부부끼리 오신 동창들이 많으시네요. 자, 제가 부부를 위하는 동안 여러분은 동흥을 위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에이 자, 잘 들어봐요. 제가 부를, 두 번, 크게 외칠테니까 여러분은 뭐라구요? 동, 흥! 자랑스러운 우리 모교의 이름을 외쳐주시고 함께 위하여, 외쳐주시면 되겠습니다. 자 큰소리로, 부, 부, 위하여!”
 다소 연배가 느껴지는 주헌의 힘찬 권주사가 이어진 후로 오랜만에 모인 동흥고 21기 동창들은 시끌벅적하게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대관한 술집은 가득차 간이의자를 가져와 좁게 모여앉아야했고, 실내는 금새 소리와 열로 가득찼다.
 “저기, 우리 고 의원님은 언제 오십니까?” 잠시 소란이 잦아들고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누군가가 손을 들고 외쳤다. 주헌은 마치 정욱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일어나서 대답을 대신했다.
 “자 일단, 제가 보좌관은 아닌데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야유소리와 웃음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바쁜 일정 중에 짬내서 꼭 오신다고 하셨으니까, 먼저 자리 뜨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이노무자식 연락 한 번 해보고 오겠습니다.”
 “이노무자식, 등장했습니다.” 마침 그때 정욱이 한껏 힘을 준 착장으로 술집에 들어서며 말을 받았다. 그 뒤로는 험악하게 생긴 덩치 큰 남자 넷이 검은 정장과 선글라스, 무전기를 찬 채로 따라들어왔다. 그 위압감에 잠시 장내에 정적이 찾아왔다.
 “야 이새끼야, 너는 형님 보러오면서 무슨 따까리들을 그렇게 달고왔냐?” 술에 취한 상덕의 외침에 잠시 얼어붙을 뻔했던 분위기는 정욱이 더 큰 너스레를 떨면서 대답을 한 덕에 다시 녹아내렸다. 좁은 실내의 열기와 어둑한 조명에 시야가 흐려졌는지 슬쩍 선글라스를 벗어 닦고있던 경호팀장은 정욱의 신호에 팀원들을 데리고 돌아나갔다. 정욱은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자 친구들, 이제 제대로 한잔 할까?”

 오늘의 이 모임은 비공식적인 정욱의 선거 유세 자리였다. 아직 공식적인 출마선언을 하기 전이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혹시나의 잡음을 방지하기 위해 공직에 연이 있는 친구들을 철저하게 걸러내고 사람들을 불렀으며, 그마저도 모든 책임은 주헌에게 돌리고 정욱은 다만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을 보러 온 것으로 말을 맞춰두었다.
 술값은 정욱이 낼 것이고 경호원들은 거리를 둔 채 술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시하고 있겠지만.
 정욱은 언변이 좋고 주량은 더욱 셌으며, 정치 생활동안 익힌 다양한 개인기들을 선보이며 술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홀리고 있었다. 뇌물이나 주려는 줄 알고 큰 기대없이 따라나온 일행들도 소탈하고 인간적인 정욱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참이었다. 물론 참가 경품의 명목으로 추첨이라는 허울좋은 핑계를 통해 돌아가는 청탁성의 경품들도 준비는 되어있었지만 말이다.

 어느 새 마련된 코너 속의 코너에서 정욱과 남자 동창들이 팔씨름 대결을 벌이는 동안, 여자 동창들은 동흥 21기에서 가장 멋진 남자가 누구였는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소위 F4에는 정욱, 장군, 민구, 그리고 규민이 포함되었다.
 정욱은 리더십과 카리스마, 장군은 짐승같은 힘과 몸, 민구는 노래실력과 꽃다운 미모를 담당했고, 규민은 인간승리의 서사를 담당했다. 말하자면 볼품없는 주인공이 주인공인 것으로 유명한 셈이었다. 한때 말더듬이 찐따였던 평범하기 그지없던 주인공이 갑자기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아니, 자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온다? 규민은 넷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팬층이 두터운, 말하자면 주인공 중의 주인공이었다.
 자연스럽게 동흥제, 즉 학교 축제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갔다. 매년 열리는 축제지만 그 중에서도 여태까지 역대급이라 회자되는 21회 동흥제에 올렸던, 제1회 동흥극회에 대한 이야기에는 F4 각각이 기여한 이야기가 빠질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정욱은 자신의 선거 유세에도 동흥극회 이야기를 써먹을 정도이니, 학교의 표어대로 동흥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겠구나 하며. 적어도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곧 동흥제와 극회를 알게 될 참이었다.

 “조국의 미래 동흥! 인류의 등불 그대!”
 낯간지러운 표어를 마지막 권주사로 술자리가 파하고 정욱은 가장 먼저 술집을 나섰다. 계산은 마친 뒤였다. 주헌이 선물을 나누어준다는 핑계로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동안 안전하게 빠져나가기 위해 맞추어둔 동선이었다.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정욱 앞을 초췌한 차림의 노숙자가 술병을 들고 막아섰다.
 “이… 시발새끼…” 제대로 씻지도 않고 면도도 하지 않아 초췌한 몰골의 노숙자는 술에 취한 듯 쌍욕을 뱉으며 내리치기라도 할 듯 소주병을 움켜쥔채로 정욱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욱은 풀린 눈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경호원들은 그의 지시로 차에 탄 채 대기중이었는데, 술집 내의 CCTV만을 지켜보도록 되어있었기에 지금 만약 습격을 당한다면 알아챌 수 없을 것이다. 돌아서자니 등을 보이게 되고 지나치자니 부딪히는 일을 피할 수가 없는, 나름의 위기였다.
 이 사람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온 것일까? 무언가 말이라도 걸어보려는데 노숙자를 아는 듯 보이는 사람이 정욱의 뒤에서 달려나와 그를 저지했다. 상덕이었다.
 “빨리 꺼지지않고 뭐해?” 상덕은 노숙자를 어루달래는 말투로 꽉 끌어안으며 정욱을 보냈다. 정욱은 차에 타서 오늘 자신이 처할뻔한 위험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그 사람은 상덕의 친구였을까. 비슷한 수준의 질 낮은 친구들을 아직도 사귀고 있는 것일까.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누구였더라. 하지만 곧 술에 취한 정욱은 잠에 빠져들어 그 일을 잊었다.
 상덕은 마찬가지로 술에 취한 채 그 노숙자를 꼭 끌어안고 울면서 되뇌이고 있었다. 반쯤은 본인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 것 같았다.
 “용주야, 이제와서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니. 용주야, 그만 놓아라. 이제 그만 놓아주어라. 용주야.”